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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낭 Jul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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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써내기 어렵고 두렵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짚어내는 사람은 적은 것 같아 글을 쓴다.


이번 서이초 선생님 사망 사건을 듣고, 나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규교사 시절 담임 학급에 학교폭력 사건, 성범죄 사건들이 있었다. 퇴근 후 늦은 밤에 집에 있을 때도 개인 전화로 보호자가 소리치는 걸 들었고, 학생들이 교탁 위에 버린 음식물쓰레기들을 혼자 닦아내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울었다. 학교폭력 가해자 학생을 진심으로 미워했고, 피해자 학생이 전학가는걸 지켜봐야 했다. 매일매일 무력감과 자기혐오에 지쳐갔다.


3년차, 4년차가 되어도 비슷했다. 새벽에 깨어날 때면 창문이나 식칼을 계속 쳐다봤다. 그럼에도 선생님 사랑한다고 달려오며 간식과 편지를 주던 학생들, 어린 교사를 존중하고 고마워하던 보호자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밥사주고 술사주던 동료 교사들, 네가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된다고 말해준 엄마가 있어서. 운이 좋게도 언젠가 잘할 거라고 믿어준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이런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교사는 학생들과 보호자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직업이다. 교사의 교육활동은 학생과 보호자에게 평가받고, 민원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평가 방식과 민원 문화이지, 평가와 민원을 없애서는 안 되고 없앨 수도 없다. 교사의 교육활동이 '교권'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권이 보장되는 학교와 평등한 교육을 위해 싸웠던 학생과 보호자와 선배 교사의 노력을 짓밟고, 옛날의 체벌과 촌지가 있던 학교로 퇴행하는 길이다.


교사의 기본적인 인권과 노동권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의 민원, 업무나 성과 위주가 아닌 수업 연구 활동과 생활지도 과정을 보며 성장 기회를 주는 평가, 학생 한 명 보호자 한 명 눈 마주치고 소통으로 함께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도록 학급당 학생수 축소, 행정 업무 경감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에 처한 교사를 실질적으로 지원해 줄 법적, 제도적 장치와 교사의 전문성을 키워줄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의 학교교권보호위원회는 정당한 교육활동을 침해한 학생은 제재할 수 있지만 보호자는 제재할 수 없다. 학교 일로 병을 얻은 교사들은 공무상병가나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어렵다. 학교전담경찰관은 여러 학교를 동시에 담당한다. 교사는 신규 임용이 되는 3월 1일날 사수나 멘토도 없이 바로 담임과 수업을 맡는다. 교원 임용고시 범위에도 교육실습 때도 학생과 보호자와 대화하는 법은 아무도 안 가르쳐준다. 학교폭력 관련 법령과 매뉴얼은 배우지만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학급운영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가 없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설문조사에서 "학부모 민원 발생 시 경험했던 지원에 대해서" 교사들은 "동료 교사들의 지원(65.2%)"을 첫번째로 뽑았다. 서로 돕고 지지하는 학교 공동체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학교 공동체를 만나지 못 한다면 교사 개인이 홀로 책임지고 견뎌내야 한다. 더 이상 최소한의 구명조끼도 없이 교사 개인들이 맨몸으로 버텨야 하는 구조여서는 안 된다. 출근해서 빈 교실을 바라봤을 때, 자신이 쓸 모 없는 존재라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을 거라고 여기게 만들면 안 된다.


정치인들이나 단체들은 너무나도 쉽게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에 대한 아동학대 면책 특권을 말한다. 말도 안 되는걸 대안이랍시고 내놓아 여론을 속이고 있다. 아동은 성장 과정에서 교사뿐 아니라 아이돌보미, 보육 교사, 유치원 교사, 학원 교사, 돌봄전담사, 방과후 강사, 조리사 선생님, 지킴이 선생님 등 많은 직업들을 만난다. 아동을 대면하는 모든 직업은 아동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언제나 자신의 돌봄과 교육 활동이 아동의 인권과 발달에 피해를 끼칠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조심해야 한다. 이 중에서 학교 교사만 면책 특권을 줄 수는 없다.


학교 교사의 업무들이 젠더화, 위계화 되어있는 문제도 짚어내야 한다. 아직도 초등학교에서 담임은 '섬세한' 여교사가, 생활지도나 학교폭력 업무는 '엄격한' 남교사가 맡는다. 저학년은 '말을 잘 들으니' 경력 많은 교사가 맡고, 고학년은 '말을 안 들으니' 경력 낮은 교사가 맡는다. 어린 여교사는 남교사보다 더 섬세한 돌봄을 할 것이라 기대받고, 그런 젠더화된 역할에서 한끗이라도 벗어나면 민원을 받아야 한다. 나는 나이 어린 여교사들이 학생과 보호자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고 말도 안 되는 요구와 민원으로 능력을 의심당하는 것을 수없이 봤다. 나는 나이 많은 남교사가 민원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는 성명서에서 "부모들은 자녀 양육의 불완전함에서 불쑥 찾아오는 자신의 불안을 교사에게 전가하지 않아야"한다고 했다. 보호자가 불안한 이유는 뭘까. 보호자도 보호자 이전에 노동자다. 보호자는, 특히 여성 보호자는 완벽한 부모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노동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해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모두 알다시피 너무 길고, 입시경쟁이라는 불안 속에서 학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은 보호자와 대화할 시간이 부족하다. 내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는지도 모르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학교에서 사건이 터졌다하면 감정이 격해져 따지게 되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이번 사건은 개인의 슬픈 사건이기도 하지만,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우리 사회의 인권 문제, 노동권 문제, 성차별 문제이기도 하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안전망 부재의 문제라고 보는 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교사들이 교사의 권위를 내려놓지 않고 교사집단의 권익만 따진다면, 절대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정부와 교육 정책 전문가는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교사뿐 아니라 학생과 보호자를 포함한 다른 시민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일시적인 보여주기식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인 연구 지원과 다양한 교육 주체의 숙의를 거친 교육정책이 필요하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교권 대 학생 인권"의 대결구도에 대해서는 비판했으니 말을 아끼겠다. 인권은 시소처럼 한 쪽이 올라가면 한 쪽이 내려가는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그건 당연한거다. 또한 인권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인권과 노동권과 성평등이 보장된 사회에서는 교사도 학생도 다른 노동자들도 모두 안전하고 평등할 것이다. 이런 사회는 불가능하지 않다. 아직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선함과 의지가 본성이 아니라, 뇌의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이다. 어려워도 계속 상상하고 행동한다면 뭐라도 변하겠지. 그렇게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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