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봄비가 내립니다

며칠치 미세먼지를 한꺼번에 씻어내는 가장 쉬운 방법

by 수담

며칠째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바깥을 내다볼 때마다 뿌연 공기가 창문을 막고 있었고, 저는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 앱을 들여다봤습니다. '매우 나쁨'이라는 빨간 글씨를 보며 창문 여는 것을 포기하기를 반복했죠.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문득 맑은 하늘이 그리워졌습니다. 공기가 맑다는 게 이렇게 그리울 수 있는 건지, 미세먼지가 없었을 때는 몰랐어요. 좋은 것은 사라져야 비로소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나 봅니다.


그러던 오늘 밤,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어요. 귀를 기울이면 분명히 들렸고, 커튼을 걷으니 창문에 빗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봄비였어요. 마른땅을 적시는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창문을 살짝 열었어요. 찬 공기와 함께 비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흙과 물이 만나는 그 냄새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다렸다'는 말이 딱 맞는 냄새였어요. 영어로는 '페트리코르(petrichor)'라고 한다더군요. 말이 어렵긴 한데, 오늘 밤만큼은 그 단어가 꽤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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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비를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우산을 챙겨야 하고, 신발이 젖고, 교통이 막힌다고. 저도 평소에는 그 의견에 은근히 동조했는데, 봄비만큼은 이상하게 편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렇게 며칠간 미세먼지가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어놓은 뒤에 내리는 비는 더욱 그렇죠. 마치 누군가 더러워진 칠판을 조용히 지우개로 닦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세상이 한 번 씻겨 내려간다는 느낌. 사실 그게 비 냄새를 맡을 때마다 느끼는 안도감의 정체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강연을 하면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생에도 때로 이런 봄비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뿌옇게 쌓인 것들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시간, 억지로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시간 말이에요. 그런 시간은 계획해서 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어느 날 밤, 아무 예고도 없이 봄비처럼 찾아오는 거죠. 강의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수강생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저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겠죠.


사실 요즘 마음이 좀 뿌옜어요. 강의 준비에, 원고에,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서 미세먼지처럼 뭔가가 잔뜩 쌓여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오늘 밤 이렇게 빗소리 앞에 앉아 있으니, 그 뿌연 것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봄비가 제 마음의 미세먼지도 같이 씻어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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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로 빗소리를 들으며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딱히 뭘 하는 것도 아니었고, 심오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빗소리를 듣고, 가끔 창문 너머 빗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게 전부였는데도 마음이 꽤 충만했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뭔가 대단한 게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럴 때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들은 이렇게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화려하지 않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일 아침에는 하늘이 조금 맑아져 있겠죠?.. 아마 또 날씨 앱을 열어볼 것 같긴 하지만요.

사랑의기술-칠판클로드버전(서부도서관26.4.11.).jpg 사랑의 기술 - 4.11.(토) 북콘서트 강연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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