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바늘

북극을 가르키는 지남철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by 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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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평범한 저녁이었어요. 퇴근 후 무심코 틀어놓은 TV에서 손석희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뉴스브리핑 마지막 코너.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시 한 편을 읽기 시작했죠.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순간 마음속에서 "쿵"... 떨고 있는 나침반? 고장 난 게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니.

신영복 선생님의 이 시는 그렇게 제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어렸을 때 등산을 하며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나침반을 유심히 본 적이 있어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늘이 북쪽을 향하긴 하는데, 정말 조금씩 떨리더라고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요. 그때는 "왜 바늘이 떨릴까? 고장 난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그 떨림이야말로 정상이라는 것을.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요.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어도 떨립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해도 불안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밤잠을 설치죠. 이런 떨림을 우리는 종종 약함으로, 확신이 부족한 증거로 여깁니다.


지난달에 한 젊은 친구가 찾아왔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려는데 자꾸 망설여진다고 했습니다. "방향은 정해졌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확신이 부족한 건가요?" 그 친구의 손도 나침반 바늘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어요.


그때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나침반 바늘이 떨리는 건 고장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야. 자기장을 감지하고 있다는 신호지. 네가 떨리는 것도 마찬가지야. 지금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네 인생에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거니까."


생각해보면 정말 확신에 차서 흔들림 없는 사람이 있긴 할까요? 있다면 그건 오히려 위험한 신호일 수도 있어요. 주변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파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테니까요. 떨림은 우리가 살아있고, 느끼고 있으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재미있는 건 나침반 바늘이 떨린다고 해서 방향이 틀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에요.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북쪽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떨리면서도 걸어갈 수 있어요. 불안하면서도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두려우면서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떨림과 방향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아요.


우리 사회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강요하는 것 같아요. 자신감 넘치게, 당당하게, 의심 없이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짜 용기는 떨리지 않는 게 아니라 떨리면서도 나아가는 거예요. 나침반 바늘처럼 흔들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진정한 용기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다 떨렸던 것 같아요. 첫 고백, 첫 출근, 결혼식, 아이의 탄생, 새로운 도전. 떨림 없이 맞이한 중요한 순간이 있었나요? 없었을 겁니다. 떨림은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주는 신호니까요.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이 떠는 이유는 두려워서가 아닐지도 몰라요. 어쩌면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어서, 그 책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떨림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이 선택이, 이 순간이, 이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무언가 앞에서 떨리고 계신가요?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떨림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