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에 한 번씩 옮겨야 할까?
직장을 옮기다 보면 너무 자주 옮기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지는 경우가 있다. 차라리 명확한 가이드라인이라도 있다면 룰에 맞춰서라도 옮길 텐데, 그런 게 없으니 더 불안하다. 적정 이직 횟수에 관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업계 공통으로 통용되는 표준 가이드라인과 각 산업별 특성에 따라 달리 움직이는 가이드라인이 각각 존재한다.
업계 표준 가이드라인
잡마켓에는 표준으로 통용되는 이직 횟수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다. 모 그룹의 최고 경영권자가 구두로 직접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10년에 세 번이라는 가이드라인이다. 이보다 이직 빈도가 더 높은 사람은 뽑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관계가 확인된 바는 없지만 실제 그 그룹사의 모든 계열사는 이 룰을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세 번의 이직이면 10년간 네 개의 회사를 경험하는 것도 괜찮은가? 아니면 두 번의 이직을 통해 세 개의 회사까지가 가능한가가 궁금해질 수 있다. 경험상 이 부분은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 회사에 최소 3년의 경험”을 기준으로 계열사마다 조금씩 다르게 운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업의 특성이나 회사 방침에 따라 해당 그룹 내 계열사 중 어떤 회사는 10년에 한 번 정도 이직한 사람을 선호하고 두 번 이직한 사람까지만 받는 타이트한 룰을 적용하는 기업도 있고, 최근 10년간 이미 세 번을 이직한 그래서 이번이 네 번째인 사람까지를 마지노선으로 받아주는 기업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에서 언급한 그룹사 외에 다른 그룹사 중에는 평생 세 번 이상 이직한 사람을 아예 채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또 다른 회사의 경우 4년 이상 근무한 경험이 한 번도 없는 후보자는 부장급 이상 리더로는 아예 추천을 받지 않기도 한다.
3년 가이드라인의 제정 이유
한 회사 3년의 가이드라인은 해당 그룹사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잡마켓에서도 통용되는 가이드라인이다. 해당 그룹의 관련되신 분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경력이 체화되어 본인의 것으로 되기 위해선 최소 3년의 시간이 걸리며 그 이전에 직장을 옮겨선 업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습득했다고 할 수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로, 3년 이하의 주기로 옮기는 사람은, 어느 회사에서든 소속감을 가지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본다는 것이다. 모든 회사가 그다음 회사를 가기 위한 스프링보드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합당한 견해라고 판단된다.
업종별 특수 상황
업계 공통의 표준 가이드라인 외에 업종별, 회사별로 차별적인 판단 기준도 통용된다. 일반적으로 IT 업계는 이직이 그다지 흠결이 되지 않는다. 프로젝트성으로 업무가 진행되는 SI, 순수 개발 쪽이 그러하다. 30대 중반의 능력 있는 개발자는 아예 소속이 없이 프리랜서로만 뛰기도 한다. 수요가 많은 Java, 닷넷, DB 모델링, 프런트엔드 개발 쪽은 실력 있는 프리랜서들의 숫자가 정규직 숫자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력서에 회사명을 명기하지 않고, 프로젝트 리스트만을 이력서처럼 들고 다니기도 하는데, 사용자 회사 측에서는 잦은 이직을 하등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컨설팅 회사들도 이런 속성들이 있다. 액센추어, E&Y(어니스트 앤 영), PWC, IBM, 딜로이트 등에 소속된 컨설턴트들은 프로젝트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특정 조직이 통으로 다른 조직으로 이동하기도 해서 이직 횟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퍼포먼스와 레퓨테이션 만으로 뽑기도 한다. 그 외 마케팅, 업종으로는 패션, 업무 상으로는 머천다이저 등처럼 트렌디한 특성을 지닌 회사나 포지션의 경우도 이직 횟수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된다. 단 그러한 업종이라 하더라도 현업 일선 전문가가 아닌 관리 조직의 경우라면 이직 빈도가 고려된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특수한 기능직을 제외하고는 모든 직원들의 이직 빈도수가 역량만큼 중요하게 고려된다. 조직 정체성의 유지, 헤드헌팅 비용, 온보딩 비용 등은 잦은 이직을 선호하지 않는 팩터와 관련되어 있고, 최신 트렌드와 역량의 조달 욕구는 잦은 이직을 선호하는 팩터와 관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팩터의 트레이드오프 관계가 업종별 특성과 함께 고려되면서 산업별 적정 이직 횟수에 대한 암묵적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다고 보면 된다.
국가별 특수 상황
공채가 없이 경력직으로만 뽑는 외국계 회사의 경우 이직 빈도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규모가 클수록, 관리직 속성이 강할수록 이직 빈도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구인 행위 자체가 엄청난 비용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외국계중에서도 유럽계와 미국계 회사의 속성이 다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정설로 통한다. 미국계는 시장 상황에 따라 조직을 급격히 불렸다가 상황이 안 좋으면 빠른 속도로 줄이는 특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직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럽계는 조직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구조조정 빈도도 미국계에 비해 덜한 편이고,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도록 이직이 적은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고 수많은 회사들이 부도처리되었지만 부도난 대부분의 회사들은 미국계 회사들이었다. 서브프라임 사태 때 부도난 유럽계 금융기관들은 극히 일부이고, 그마저도 1차 기업의 부도로 인한 2차 파급으로 부도가 난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특성은 우연적인 현상 혹은 패턴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성장 배경과 인센티브 제도의 구현, 노동법의 발현 형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유의미한 차별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잡마켓은 국가별로도 조금씩 다르다. 국가별 산업 구조, 인구 구조 등에 의해 잡마켓의 구조도 변화를 겪는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하는 단카이 세대가 취업 적령기를 지나가면서 심각한 취업 인구 부족에 빠져 있다. 우리나라보다 더 높은 수준의 헤드헌팅 피를 제공하면서 사람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나라에선 같은 실력이면 이직이 없는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성이 커진다. 홍콩, 싱가포르의 경우 전 세계 글로벌 컴퍼니의 아시아 퍼시픽 헤드쿼터가 많이 위치해 있고, 소속감이 없이 퍼포먼스 위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많아, 잦은 이직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3년 이상 한 자리에 머무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본다고 한다.
제품 수명 주기별 특수 상황
각 회사에서 생산되는 주력 제품은 조직 구성원들의 의식 구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제과회사들은 노동의 가치를 껌 한통 값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거 벌려면 껌을 몇 통 팔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업무에 임한다. 그러다 보니 비용 절감이 생활화되어 있고 급여가 박하다. 조선소 직원들은 배 한 척 만드는 비용과 시간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통이 크고 조금 느긋하다. 최근 조선소들이 망하게 된 이유로 이런 요소들도 포함되지 않나 생각한다. 암튼 이런 특성 때문에 제조회사 중에서도 수명 주기가 짧고 트렌디한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는 짧은 이직이 덜 문제가 된다. 금융권의 경우 증권, 투자 관련 회사는 보험, 은행에 비해 잦은 이직이 덜 문제가 된다. 패션, 엔터테인먼트, IT, 스타트업 등도 짧은 이직 주기를 용인하는 문화특성을 가지고 있다.
업종간 이동
호흡이 긴 업종에 있던 사람이 호흡이 짧은 업종으로 이동하는 경우엔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잦은 이직이 보편화된 조직에 있던 사람이 그렇지 않은 조직으로 이동을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대표적인 경우가 컨설팅 업종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 대기업으로 이직하려고 할 때이다. 입사할 조직의 실무 레벨과 말을 다 맞춰 뒀는데 잦은 이직이 문제가 되어 그룹 인사팀에서 퇴짜를 놓는 경우가 자주 있다. 지원자가 능력도 있고 회사에 뼈를 묻고 싶은 욕구도 크지만 아예 지원조차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이직은 한 번 쓰면 다시 쓰기 어려운 유한한 리소스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