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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y 12. 2023

스마트폰이 박살난 날

'서두르면 일을 망치게 되고, 패턴에서 벗어난 일을 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일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 바보. 바보. 제발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살지.'

괜히 죄 없는 머리를 쿵쿵 쥐어박아 보지만 소용이 없다. 일은 벌어졌고, 책임져야 할 일만이 남았다. 


생각해 보니 눈이 참 괘씸하다. 눈이라는 건 본디 사물을 잘 살펴 캐치하라고 있는 것인데, 내 눈은 장식으로 달렸나? 아니 눈에 반응하지 못한 머리가 잘못인가? 그렇다면 바보 같은 머리는 군밤을 맞아 마땅했네. 자책에 후회를 쌓고, 합리화로 마음의 짐을 덜어보려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머리가 바보가 된 날, 내 스마트폰은 박살이 났다.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물속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고, 숨이 끊어질 정도로 물을 들이마신 폰은 비참한 모습으로 떠나갔다. 그날은 분명 다른 날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이었는데 나에게 아픔을 남기고 떠났다.


사건이 발생한 날에 남편은 출근을 하지 않았고, 휴학 중인 딸은 서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평소 월요일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남편이 집에 있어서 보통의 월요일이라면 하지 않은 일을 했다. 딸의 방을 청소하고 침대를 덮었던 천을 걷어내어 세탁기에 넣었다. 천이 얇아 세탁통이 허전했다. 침대 패드 하나 정도는 더 돌릴 수 있겠다 싶어 우리 방 패드를 벗겨 허전한 세탁통을 채웠다. 그게 화근이 될 줄 몰랐다. 굳이 월요일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이불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됐는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처해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빨래가 되는 동안에는 아무런 이상도 예감하지 못한 채 출근 준비를 했다. 준비를 끝내고 학원을 가려다 얼추 빨래가 되었을 거 같아 인심 좋게 너는 일까지 할 요량으로 세탁실로 갔다. 이불을 꺼내는데 뭔가 쿵하고 떨어졌다. 뭐지?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봤다. 일시 정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깜박여 다시 봤다. 내 스마트폰! 아니,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재빨리 주워 들고 상태를 살폈다. 코팅지가 붙었음에도 유리가 박살 나 있었다. 그냥 물만 마신 게 아니라 세탁기 안에서 모질게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어떡하지? 심폐소생술이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누르고 두드렸다. 켜지지 않았다. 주위를 살폈다. 숨겨야 하나? 숨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이실직고해? 남편의 잔소리가 장난 아닐 텐데. 어떡하지? 답을 찾아야지. 오만 가지 생각이 쓰나미로 밀려왔다.  


옥상에 이불을 널고 내려오는데 몇 분 사이에 다리는 천근만근이 되어 있었다. 왜 스마트폰이 세탁기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화장실에 갈 때 스마트폰을 침대에 올려놓고 갔나? 그럼 패드를 걷을 때 봤을 텐데. 만약 침대에 올려놨다가 그리 됐다면 그 또한 문제다. 남편은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남편의 잔소리에 절여질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은 벌어졌고, 폰을 구입하려면 알릴 수밖에 없는 걸.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게 낫겠다 싶어 자진 신고를 위해 방문을 열었다. 노트북을 보느라 정신없는 남편의 등을 향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떡해'란 말과 함께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뭘 어떻게 했는데 폰이 그렇게 깨졌어? 설마 바꾸려고 일부러 깨뜨린 거 아냐?"


남편이 웃었다. 심각하지 않게 물을 때는 심각하지 않게 웃어넘기는 게 맞다.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난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라, 거짓으로 진실을 덮을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정의로운 바보가 되어 진실을 말하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 큰 핸드폰이 세탁기에 들어간 것을 몰라. 그러게 내가 빨래할 때는 늘 확인 좀 하라고 했잖아. 치매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래."


정색하고 소리치는 남편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쫄보가 되었다.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난 그 분야에선 범죄경력이 화려한 사람이다. 남편의 지갑은 물론이고 차키도 빤 적이 있다. 그뿐이랴. 아들의 지갑과 내 가죽 장갑까지 빨아버린 사람이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한 범죄까지 포함한다면 그 끝은 헤아릴 수가 없을 테고.


그렇다고 내 행동이 치매와 관련이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간혹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것을 치매 초기 증상으로 치부하기엔 억측스런 면이 있다. 사람들 중에도 기존에 알고 있던 단어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아 불안해 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치매 초기 증상이라고 의심할 수는 없다. 학원에서 수업을 할 때 아이들 중 갑자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초성만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이 흔하니 말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치매 초기 증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처럼 서두르다 스마트폰이 이불에 쓸려간 것처럼, 반찬 그릇을 정리하다 스마트폰을 냉장고에 집어넣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물을 끓이다 재미있는 드라마에 빠져 물이 끓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모두 다 치매 초기 증상이야'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그건 단지 부주의에 의한 실수지 정신적인 문제는 아니다.


어버이날, 나는 부주의했다. 꽃가루가 잦아든 것이 좋아, 쨍한 볕에 빨래를 말리고 싶은 마음이 앞서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는 했어도 치매는 아니다.


치매가 아니었어도 실수가 남긴 피해는 컸다. 모든 전화번호가 날아갔고, 내 인생의 젊은 날들이 사라졌다. 이제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은 지금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세탁기 속에서 유명을 달리한 스마트폰이 남긴 가장 큰 피해는 바로, 나를 계속 남편에게 잡혀사는 덜렁이로 만들었다는 서글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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