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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어수인 Jun 18. 2021

프로혼밥러, 혼밥 어디까지 해봤니?

혼밥의 달인을 소개합니다




  혼밥의 달인이 된 나의 혼밥 역사를 반추해 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내 만성통증은 온몸에 퍼졌다. 방과후에 정형외과와 치과를 번갈아 가며 다니던 계절. 턱관절이 느슨해져서 질긴 음식을 못 먹는 걸 신호탄으로 10년 동안 교정을 했다. 처음에는 좀 불편했지만 낙천적인 성향 덕분에 잘 버텼다. 정형외과 가는 날보다 치과 가는 날의 기분이 산뜻했는데, 아마도 치료의 종착역을 예감했나 보다. 전자는 끝이 희미하지만 후자는 끝이 선명하다는 걸.


  치과 치료가 끝나고 이따금씩 '배 레스토랑'에 들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배 모양을 한 근사한 레스토랑을 배 레스토랑이라고 불렀다. 갈색 교복을 입고 들어간 열일곱 살 소녀.

  "몇 분이세요?"

  "혼자예요."

  빙그레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한 나. 혼밥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턱관절 치료를 받으며 서러움이 몰려오던 때에 낭만적인 한 끼 식사로 나 자신을 위로던 그날 저녁을 기억한다.


호텔 뷔페 조식




  프로혼밥러가 될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 외로움을 덜 타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유형.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식당 문을 밀 수 있는 용기가 장착된 사람. 혼자 여행 가고 혼자 영화 보는 걸 즐길 줄 아는 영혼. 그렇다. 나는 프로혼밥러가 될 기질을 적립해가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에 영화관을 좋아하지 않는 연인을 존중했던 나. 과제하다가 출출하면 분식집에 가서 혼자 김밥을 먹는 나. 친구들이 귀찮아서 여행 계획만으로 만족할 때 혼자 도쿄에 간 나. 이런 '나'가 모여서 유쾌한 혼밥러가 되었다. 고독하지만 경쾌한 미식가는 매년 길을 개척하였다. '경쾌한' 형용사를 붙인 이유는 혼자 먹어도 리액션은 빼놓을 수 없는 법. 싱가포르에서는 혼밥하다가 인연이 닿은 여성분과 여행을 같이 했다. 몇 년 전에는 초밥을 맛있게 먹는다고 요리사님이 초밥 한 개를 서비스로 주셨다.


몇 년 전 싱가포르 칠리크랩 레스토랑


  혼자 뷔페 음식을 음미하는 과정을 수료하고, 내게 남은 건 고급 레스토랑에서 혼밥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타인의 눈을 덜 의식하는 사람이라도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이다. 몇 년 전 싱가포르 여행 미션은 '여행자 S 찾기, 자존감 회복'이었다. 건강을 잃은 나에게 대접할 힐링푸드, 퇴사 후에 낮아진 자존감을 치유해줄 음식을 찾는 중이었다.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칠리크랩만큼은 내게 선물하고 싶었다.


  드디어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칠리크랩을 먹었다. 배 레스토랑에서 '음~ 맛있어!'를 허밍하던 나를 되찾았다. 음식의 맛을 무지개 단위로 구별하고 감각을 자유롭게 해방시킨 그날 낮을 기억한다. '칠리크랩을 혼자 먹을 정도로 용감한 나인데 뭔들 못하겠어. 앞으로 병원 치료를 길게 받아야 하지만 배 레스토랑에 혼자 갔던 나라면 잘 견딜 거야.' 오롯이 음식과 나만 존재하는 시간. 나는 민낯으로 '불안'과 마주했다. 불안을 대면하자 허기가 졌고 미각은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내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내게 그날의 칠리크랩을 운다.


혼밥의 꽃 회전초밥




  내가 가장 따뜻하게 먹은 수프는 친구 J와 함께 먹은 감자수프이고, 기억에 남는 돈가스는 엄마와 함께 먹은 안심 돈가스이다. 프로혼밥러도 사람들과 추억이 담긴 뜨끈뜨끈한 음식을 좋아한다. 음식 안에 익어가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다만 회전초밥의 리듬감 속에서 고독 한 접시와 개성 한 접시를 건져 올리는 순간도 소중하다. 회전초밥은 혼자 밥 먹으러 온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웃어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초밥들 가운데에서 눈맞춤한 초밥을 슬쩍 선택하면 된다. '더위에 부대꼈던 S,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메시지가 보이는 초밥 접시를 들었다. 프로혼밥러의 식탁에 무지개가 폈다. 다음 손님에게 위로 전해지길 바라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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