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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26. 2023

이불을 뒤집어쓴 엉터리 이상주의적 반추

오랜만에 이불빨래를 했다. 크리스마스 맞이 이불빨래인가. 문장은 뜻대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맞이 이불빨래인가 하는 말은 도대체 왜 했을까. 여러 사람에게서 인생의 중요한 판단일수록 숙고하기보단 순간적인 감에 따라 결정한다는 얘길 들었다. 내 경우엔 순간적 판단은 아니었지만 이성적인 판단도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건축을 공부하기로 한 결정 말이다. 내 입장에서야 그게 대대적인,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다. 객관적으로 봤을때 그런 식의 방향전환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 중요한건 나에게 있어서의 의미다. 


내가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건 놀라 자빠질만큼 어처구니없고 직접적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왜 하필이면 건축이냐고 물었을때, 내 대답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그게 말인지 뭔지 지금도 '객관적' 시선에서는 나조차 이해가 안된다. 건축이란게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건축은 그저 생활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분야일 뿐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들어준다고 할만한 분야가 있다면 의학이 오히려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니 의학도 그렇게 딱 드러맞는 경우는 아니다. 


애초에 '더 나은 사람'이라는 목표 자체가 너무 애매모호했던게 분명하다. 도대체 더 나은 사람이라는게 뭘 뜻하는건지 정의가 변변찮았다. 한가지 분명했던건 직장에 점차 뿌리를 내려가던 내 모습에 뭔가 커다란 결함같은게 생겨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작은 균열로 시작된건지 몰라도 어느순간 돌아봤을때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으로 계속 지내서는 안되겠다는 - 역시나 두리뭉실하기 그지없는 자각이 들었던 날이 있었다. 뉴욕 출장 첫날 호텔에서 짐을 푼 그 저녁이었다. 도대체 그걸 왜 그때 그런식으로 깨달았는지 의문이다. 


그날 내가 자각한 모습이라면 번듯한 직위 뒤에 낮게 포복해서 진실을 왜곡하는, 나 자신을 속이는 나의 모습이었다. 애초에 연애라는게 사람의 바닥을 드러내보이게 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못난 모습일 수는 없는 일, 그래선 안될 일이었다. 안팎으로 어느정도는 현실적인 조건에 양심적 부적응을 적당히 떠안고서 힘겹지만 그래도 묵묵히 살아가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살아가던 나였다. 그러나 그런 일말의 양심같은게, 의식같은게 남은 어중간한 부적응자의 역할도 하루이틀이지 그게 일년 이년, 오년가까이 지속되다보면 그건 더이상 역할이라고 하기 어려워지기 마련이었다. 


역할이라는 이름 뒤에 실체는 역할과의 괴리 속에서 보이지않게 침식되어 이름과 같은 모습을 잃어버리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사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이름의 방패 뒤에 바짝 숨어야만 그 침식된 얼굴을 들키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곧잘, 썩 잘 해내고 있었다. 그 이름과 직위뒤에 바짝 숨어 포복하고 위장한채로 세상을 겨누는 일 말이다. 아마 그 호텔에서 어둑한 방의 침대쪽에 서서 벽장을 바라보는 순간 못난 나에대한 자각만 없었어도 지금쯤 나는 방패와 거의 한몸이 되어 있었을게 분명하다. 


그렇게 나름 근사한 직위와 한몸이 되어 때마침 생각지도 못하게 발견한 정치질의 소질까지 꽃피우며 두둥실 방패가 구름인듯 떠다녔을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때로는 씁쓸하고, 훼손되는 어딘가에 대한 양심적 자각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또 그런 역할을 간간이 소화하는 매력을 장착했겠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가면을 놓칠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쯤이 아마도 마지노선이었다. 계속 그렇게 지내다가는 이제 영영 내 진짜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는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시간상의 마지노선 말이다. 


그때 꽤나 양심이 두둑한 사람마냥 그 가면을 더 늦기전에 벗어던지기로 했으니, 지금에 와서 변변찮은 민낯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고, 필연적으로 감내해야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사실 내가 하려던 일은 조인성과 같은 민낯으로 성공하는게 아니라, 세월에 침식된 민낯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그에대한 뜨뜨미지근한, 혹은 혀를 끌끌 찰지 모르는 세상의 눈초리를 온전히 -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는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완전히 무방비의 모습으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다면 그게 애초에 내가 목표한 일이었떤 것이다. 진짜 나로서 엄정한 세파에 굴러보겠다, 그런 세상 물정 모르는듯 하면서도 마음 한켠은 개운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습관이 든건지 자꾸만 한번씩은 이제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가면뒤에 숨으려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있지도 않은 방패뒤에 숨는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없다. 그게 아니라면 사라진 방패와 가면의 허전함에 불안에 떨면서 계속해서 미친듯이 도망다니는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쫓기고 도망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나 말이다. 그러다 한번씩은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도망칠 일이 아니라고, 그게 무엇이든 이제는 직시하고 - 정면으로 그 방향을 향해 돌파할 때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이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도망치지말고, 오랜 포복생활로 쇄약해진 나이지만 그래도 한번 나를 믿고 진격을 해보자고 말한다. 오랜만에 이불빨래한 침대가 포근해서 더욱더 용기가 나는건가. 뽀송뽀송한 이불과 삶에대한 용기 사이에 어떤 설득력있는 연관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내가 건축을 택함으로써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각오한 말도 안되는 엉터리 동기와 마찬가지다. 건축으로 더 나은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도, 뽀송한 이불로 북돋아지는 용기도 타인을 설득할 논리같은건 갖고있지 못하다. 하지만 타인을 설득할것 있나, 우선 나 자신을 설득하는게 급선무다. 그리고 나 자신은 보통 논리로 설득되기보다 우연찮은 발견이라거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 혹은 자각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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