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보수와 진보당원이 같은 채널에 소개되는 이상한 곳
릭이 페이스드로잉서울의 큐레이터로
함께하자고 제안했을 때, 망설임은 없었다.
멋진 프로젝트에 멋진 사람을 초대하는 일은 익숙했다.
컨퍼런스를 열고 연사를 큐레이션하고,
한겨레21 칼럼을 통해 빛나는 사람들을 세상에 소개하는 일.
그건 내가 오랫동안 해온 ‘연결’의 방식이었다.
제안 미팅을 받고 30명의 멋진 사람들을 쭉 리스트업했다.
하지만 2주 정도 지나면서 큐레이션의 무게가 무거워졌다.
응당 커뮤니티란 ‘같은 결의 사람’을 모으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애국보수도, 진보당 당원도 있다.
그들이 나란히 한 채널의 화면에 등장하는 걸 보며, 문득 생각했다.
“서울의 100명의 얼굴이란 무엇일까?”
내가 믿는 ‘멋짐’의 기준이 정말 유효한가,
내가 멋지다고 느끼는 사람을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낄까?
혹은 나는 너무 ‘혁신주의적’ 시선으로만
사람을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난 5년을 돌아보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혁신’으로 설명되는 사람들이었다.
창업가, 크리에이터, 실험가, 그리고 그들의 빠른 언어.
그러나 페이스드로잉 안에서 나는 조금 다른 결의 삶을 만난다.
정치적 색깔도, 직업도, 말투도, 모두 제각각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 또한 여전히 소셜버블 안에서
나에게 편한 감각만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인터뷰 D+50, 여정의 절반을 지나고 있다.
모든 인터뷰를 직접 따라가진 못하지만,
크리에이터팀의 디스코드 방을 스쳐지나가는 키워드들만 봐도
삶이 얼마나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한다.
소셜미디어의 대안으로서 커뮤니티가 주목받는 요즘.
나는 종종 오히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보다
커뮤니티가 더 폐쇄적 소셜 버블을 만들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페이스드로잉은 그 버블을 깨는 실험이다.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얼굴들’이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다시 그려보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