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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KAVIA Sep 19. 2023

우기에 떠난 방콕 여행 기억

그래도 여행은 계속된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동생 차를 타고 시원스레 뻗은 방콕의 고속도로를 쏜살 같이 내달렸다. 좌, 우로 빠르게 오가며 쉼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닦아내고 있는 와이퍼의 움직임이 전부였다. 


"우기긴 우기구나."
"하여튼 형도 참... 날씨 좋은 때 오시지..."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운전대를 잡은 동생(방콕 거주)이 말을 건넨다.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냐, 그래도 온 게 어디야!”  


차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동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뉴질랜드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같은 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후 녀석은 한국이 아닌 태국으로 다시 유학을 떠났고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방콕 내 한국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 동생이 태국에 자리를 잡은 뒤 여행이든, 일이든 가능하면 방콕을 경유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짜게 되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하루 이틀 정도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식사도 하고 방콕 시내 구경도 함께 하곤 하기도 한다. 덕분에 로컬처럼 여행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러한 로컬 여행은 기존의 여행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한 시간가량을 달려 시암 캠핀스키(Sian Kempinski) 방콕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까지 데려다준 동생은 며칠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태국인 여자친구(현재 아내)와 함께 급히 떠났다.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은 먹구름은 쉽사리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산발적으로 내리는 장대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져만 갔다.


비가 그칠 때까지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베이지톤에 짙은 그린 컬러가 매치된 객실은 차분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이동 동선을 따라 잘 배치된 가구들, 망가뜨리기 싫을 정도로 빳빳한 침구, 웰컴 푸드와 정성스레 적은 손편지까지... 호텔이 주는 기쁨은 언제나 그대로다.



방콕에서 머물게 된 시암 캠핀스키 호텔. ⓒ Photo_SUKAVIA



나를 위해 준비된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잠시 피곤을 달랬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잠이 들 것 같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챙겨간 운동복과 러닝화로 갈아 신고 피트니스 클럽으로 올라가 러닝머신을 뛰기 시작했다. 방콕 시내를 바라보며 달리는 기분, 비록 실내 피트니스 클럽이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난 뒤 호텔 내 라운지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차가 우려 지는 몇 분 동안 잠깐이지만 마음에 여유를 만끽했다. 라운지의 직원들은 언제나 상냥한 얼굴로 손님들을 응대한다. 차가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맛집 정보를 얻기 위해 대화를 시작했다.


“이 근처에서 맛있는 팟타이 집이 어디인가요?”
“어디를 가셔도 최고의 팟타이를 맛볼 수 있어요.”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그러면 당신이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은 어디인가요?”
“호텔 뒤편 작은 골목길에 있는 식당인데 저는 그곳 팟타이를 자주 먹어요.” 비밀이라도 되는 듯 소곤소곤 속삭였다.



시암 지역을 떠나기 전 한 끼는 호텔 직원이 알려준 단골 식당에서 팟타이를 맛보기로 했다. 차를 다 마셨는데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저녁 식사는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평상시에는 소문난 로컬 식당이나 길거리, 시장 등에서 식사를 하지만 아주 가끔씩 호텔 안에서 식사를 하기도 한다. 특히 컨디션이 별로거나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있는 경우에는 그렇다. 오늘은 비도 내리고, 경유로 인한 오랜 비행시간에 지칠 만큼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랜만에 호사를 누려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미식의 천국, 방콕. ⓒ Photo_SUKAVIA



호텔 안에 자리한 4개의 테마별 레스토랑 중 내가 찾은 곳은 태국 요리를 선보이는 미슐랭 식당 '스라부아 바이 킨킨(SRA BUA BY KIIN KIIN)'이다.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까닭에 레스토랑 안에는 내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연꽃이 떠 있는 듯한 모습의 실내에는 은은한 조명과 음악이 흘렀고 직원들은 능숙한 솜씨로 응대를 했다. 추천 요리와 함께 마실 와인 한잔을 주문하고 요리가 나올 때까지 꽤나 긴 시간을 기다렸다. 요리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찾아들었고 나에게만 집중되던 관심이 그제야 다른 손님들에게 퍼져나갔다. 식전주로 주문한 레드 와인을 한 잔 마시니 몸 안으로 따뜻한 온기가 퍼지고 긴장도 풀리기 시작했다. 3코스로 제공되는 요리들의 맛은 “So So, 글쎄~다!” 강렬한 태국의 맛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조금 실망이었다. 분위기 좋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퓨전 요리를 먹는 느낌이랄까. 확실한 것 하나는 입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다는 사실. 근사한 저녁 식사를 했지만 뭔가 부족한 이 기분. 결국 늦은 저녁, 우산을 챙겨 '터미널 21 푸드 코트'로 향하고 말았다.






며칠 째 계속 내리는 비, 오늘도 역시나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흔한 계란 프라이도 호텔 조식당에서 먹으면 왜 이리 품격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평상시에는 먹지 않던 식빵도 구워서 계란 프라이 옆에 살포시 두고 진한 블랙커피까지 마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반만 마신다. 쓰디쓴 블랙커피의 반은 잠을 깨는 용도로 마시고 나머지 반은 우유와 설탕을 넣고 달달한 라테로 마신다. 


아침을 먹으면서 하루 일정을 미리 체크할 수 있기에 아주 피곤한 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챙겨 먹는다. 오늘은 방콕 시내를 둘러볼 예정. 늦은 밤까지 사진도 찍어야 하기에 호텔에 돌아올 때쯤엔 아마도 파죽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우선 왕궁과 왓 포 사원을 방문하고 왓 아룬과 왓 인타라위한 사원을 거쳐 카오산 로드로 이동, 시간을 보낸 뒤 야경을 담은 뒤 돌아올 예정이다. 이동 수단은 뚝뚝, 택시, 보트 등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좁은 수로를 따라 이동하는 크롱 씬 쎕(Khlong Saen Seap) 보트. ⓒ Photo_SUKAVIA



호텔 근처 아쏙(Asoke)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기로 했다. 선착장까지 가는 동안 길거리에서 파는 열대 과일도 먹고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야외 푸드 코트에서 간단히 식사도 했다. 택시를 타고 갈까 하다가, 시간도 많고 오랜만에 파란 하늘도 볼 수 있는 까닭에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보트는 주로 현지인들과 현지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애용한다. 관광객이나 짧은 일정으로 방콕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이용할 일이 별로 없지만 현지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타곤 한다. 


나도 방콕에 머무를 땐 수상 보트로 이동을 한다. 요금도 저렴하고 막히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방콕의 무서운 교통체증(Trafic Jam)을 겪어 본 적이 있다면, 택시나 뚝뚝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넓지 않은 수로를 달리는 보트는 어쩌다 마주치는 보트가 있을 뿐, 교통 체증이 거의 없다. 물론 출, 퇴근 시간에는 늘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고생을 좀 하지만 그 정도쯤은 참을 수 있다.



수상 택시. ⓒ Photo_SUKAVIA



다행히 보트 안은 한산했다. 요금은 거리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보통 10~25밧 내외다. 요금을 받는 매표원에게 목적지를 말하면 얼마를 내야 할지 알려준다. 10미터가 채 안 되는 수로를 오가는 보트 안에서 바라보는 방콕의 모습은 왠지 모를 특별함을 선사한다. 한강에서 타봤던 유람선이나 오리배와는 다른 기분이다. 조금은 현지인이 된 것 같은 착각.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보트의 물보라는 피하기 위해 능숙한 솜씨로 천막을 올려주는 현지인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기를 20여 분, 크롱 씬 쎕(Khlong Saen Seap) 보트의 종착역인 판파 리라드(Panfa Leelard) 선착장에 도착했다. 카오산 로드까지는 걸어서 대략 10분, 비가 좀 잦아든 틈을 타 보트에서 내린 현지인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카오산 로드로 향했다.


카오산 로드에 도달하니 마치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 설렌다. 허나 카오산 로드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거의 그때, 카오산 로드는 나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곳이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이야기가 그러하 듯, 그냥 그렇게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집채만 한 배낭을 메고 이 좁은 골목으로 모여드는 여행자들, 남루한 옷차림도, 며칠은 감지 못한 떡진 머리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멋이 될 수 있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길거리에 서서 먹던 싸구려 팟타이, 골목길 한 참을 헤집고 들어가 받았던 싸구려 마사지, 복사본 론리 플래닛 가이드북, 가짜 신분증, 짝퉁 아웃도어 용품...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법한, 앞으로 가지게 될 법한  '카오산 로드의 추억' 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숙소, 마사지, 레스토랑, 카페 등이 즐비한 카오산 로드 ⓒ Photo_SUKAVIA



메인 도로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빠르게 통과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떠오르는 옛 추억들. 이제는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여행의 흔적들이다. 마음속 부다가 되어보기도 하고 세상을 알았노라 철학자가 되기도 했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튀어 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라고나 할까?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생각나는 카오산 로드. 그러나 어느 순간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카오산 로드를 제대한 지금, 더 이상 이곳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여행자들이 찾는 메카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혹시라도 다음 기회에 카오산 로드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를 위해 추억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겠다. 


카오산 로드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금 짜오프라야 강을 오가는 보트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선착장은 대로변 안쪽으로 작은 골목길을 지나면 된다. 이정표가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지만 이런 곳에 선착장이 연결된다는 것을 방콕을 처음 찾았을 땐 상상조차 못 했다. 뚝뚝을 흥정해 왕궁과 사원을 찾곤 했었다. 카오산 로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렇듯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짜오프라야 강 ⓒ Photo_SUKAVIA



보트는 서서히 선착장을 빠져나간다. 오가는 보트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기에 비까지 내린 짜오프라야 강은 엉망이다. 하지만 보트는 더욱 쏜살같이 강물을 가르며 목적지인 왓 아룬을 향했다. 엔진 소리가 서서히 사라져 갈 때쯤 보트는 타띠안 선착장에 계류했고 승객들은 빠르게 배에서 내렸다. 방콕 여행에 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원 중 한 곳인 왓 아룬 사원까지는 롱테일 보트나 뚝뚝을 이용해 갈 수 있는데 보통은 사원 맞은편에 위치한 왕궁과 함께 둘러보기 때문에 보트를 타는 편이 편리하다. 강 건너 왕궁 쪽에서 넘어올 경우에는 건어물을 판매하는 시장 길 끄트머리에 위치한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면 된다.



왓 아룬 사원 풍경 ⓒ Photo_SUKAVIA



'왓 아룬(Wat Arun)'이란 타이어로 '새벽 사원'을 의미하는데 이름처럼 이른 새벽 녁, 해가 떠오르기 직전과 해가 질 무렵 진가를 발휘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뾰족하고 긴 탑과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사원 지붕은 태국 불교 건축미와 왕실의 웅장함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석탑은 수 만개의 작은 사기와 자기가 더해져 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색으로 사원을 비춰준다. 사원을 완공하는 데 걸린 시간만도 무려 60년이 넘는다. 높이가 80미터에 달하는 대 프랑(탑)은 중국 상인들이 버리고 간 자기를 깬 조각들로 장식되었다고 전해진다. 본당 내부에는 29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원만을 둘러보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사원 구경에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아슬아슬한 파고다를 끊임없이 오르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왓 아룬 사원 ⓒ Photo_SUKAVIA



높은 파고다로 향하는 길은 모험 그 자체다. 좁은 계단의 손잡이에 의지해 올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약간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르니, 비로소 한눈에 펼쳐진 방콕이 나타났다.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교태각들. 사원은 톤부리 왕조의 과거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위가 높아진 짜오프라야 강과 그 위로 떠있는 물옥잠, 출렁이는 강물을 헤쳐나가는 롱테일 보트, 쾌속선에 몸을 싣고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높게 뻗은 고층 빌딩, 고급스러운 요트와 보트, 낡고 낡은 보트로 하루를 분주하게 살아하는 현지인들의 모습까지. 분명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활기찬 방콕의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렇게 넉을 잃고 앉아 방콕을 두 눈과 가슴에 담았다.



사원 풍경 ⓒ Photo_SUKAVIA



그렇게 한동안 사원의 정상에서 방콕을 내다보았다. 과거 이 땅에 터를 잡고 이 사원을 지었을 그 사람들의 노고와 지혜로움에 다시금 놀라고 있는 중이다. 사원의 옛 모습을 되찾고자 오늘도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왓 아룬을 오르며 기도를 하고 삶의 윤택을 꿈꾸는 순례자들도 있다. 사원을 나오는 길, 행복하게 잠이 든 고양이를 만났다. 


"넌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왓 아룬 사원에서 바라본 짜오프라야 강. ⓒ Photo_SUKAVIA



왓 아룬에서의 쫄깃했던 등반을 마치고 나는 다시금 롱테일 보트에 몸을 실었다. 검은 연기와 방수포로 측면을 덮은 보트는 나콘(Nakhon)으로 향했다. 라마 8세 다리 인근의 선착장에 도달하자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골라 잠시 몸을 숨겼다. 무서운 기세로 내리던 비는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멈추었다. 비가 그치길 바랐던 마음이 통했는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게인 하늘을 선물로 내려주었다. 라마 8세(Rama VIII) 대로를 따라 왓 인타라위한(Wat Intharawihan) 사원을 향해 걸었다.



빛 바랜 불상들도 가득. ⓒ Photo_SUKAVIA



사원 내부에는 32미터 높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미륵 입상이 서 있다. 일반적인 입상이 아니라 건물의 앞면에 부조로 만들어 놓은 형태인데 건물은 라마 6세가 통치하던 1867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27년에 마무리되었다. 입상은 ‘루앙 포 토’ 또는 ‘시 아리야메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벽돌과 석회암과 모래를 섞은 스투코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시멘트가 나오기 이전에 주로 이용되던 건축의 마무리 방식으로 부조나 형태를 만들 때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입상은 마치 학창 시절 벽에 등을 대고 키를 제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너무나도 거대해 카메라에 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다. 불상의 두 귀는 턱까지 늘어져있고 눈은 반쯤 뜨고 하단을 내려다보고 있다. 코등은 오뚝하지만 콧볼은 넓고 입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다. 부처는 발우를 들고 있으며 입상의 발을 따라 측면으로 돌아가면 계단이 나타나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진신사리가 모셔진 정상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이 부분에 부처님의 머리가 위치해 있다. 원래는 단순한 부조에 가까웠으나 1982년 방콕 200주년을 맞이해 24캐럿 황금 모자이크 타일을 붙여 도금을 시작했고 여전히 많은 불자들이 지금까지도 금박을 붙이고 있다고 한다.



황금 타일을 붙인 거대한 입상. ⓒ Photo_SUKAVIA



부처님의 머리가 위치한 30미터 인근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으나 사원을 찾았던 처음을 제외하고는 부처님의 발끝만 보며 사원에 머물다 오곤 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방콕의 여느 사원들과는 달리 한산하면서도 평온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 사진을 찍으러 자주 찾곤 했다. 불자들은 부처의 발 앞에 마련된 제단에서 기도를 드린다. 작은 불상들이 보관된 입구에는 빛바랜 동상들이 가득하다. 나가상, 입상, 좌상... 등 다양도 하다. 커다란 왕의 입상 앞에서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한분이 향 한 다발을 피우고 한참 동안 기도를 올렸다. 공물이라 해봤자 삶은 계란과 화환 한 다발, 때로는 코코넛 열매 하나가 전부다.  



거대한 부처의 발 끝. ⓒ Photo_SUKAVIA



왓 포 사원까지는 사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뚝뚝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원에서 구경을 마친 외국인 여행자와 합승하여 카오산 로드를 거쳐 왓 포 사원까지 무사히 이동했다. 입장권과 생수 한 병을 손에 들고 사원으로 입장했다. 방콕의 심장, 가장 넓은 규모를 자랑하는 불교 사원 왓 포(Wat Pho)는 1793년 라마 1세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와불상은 1832년 라마 3세가 가져온 것이며 크기는 길이 46미터, 높이 15미터에 달한다. 이 불상의 발바닥은 진주조개로 세공되어 있다. 본당 회랑에는 400 여 개의 불상이 모셔진 불상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원 안에는 찬란하고 거대한 체디(탑)가 91개가 자리하고 있다.



왓 포 사원. ⓒ Photo_SUKAVIA



사원은 화려하기만 하다. 햇살이라도 비추는 시간이면 눈이 부실 정도다. 탑을 구경하며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경내를 걸었다. 가이드를 동반한 여행자들은 가이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사원 하나에 담긴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온다. 구경을 하다 보니, 전통의학센터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안마 연구소가 나타났다. 과거 태국 최초의 대학으로 운영되었던 곳으로 태국 교육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카메라와 물통을 들고 사원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 하지만 사원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 인해 지루해져 간다. 미리 공부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행도 공부가 필요하다.' 과연 그런가? 항상 딜레마다. 어느 여행지를 가던 귀찮은 공부는 하기 싫고 막상 닥치면 무지함에 화가 나기도 한다. 참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귀동냥으로 왓 포를 구경하고 한 무리의 여행자들과 함께 사원을 나왔다. 막상 사원을 나오니, 좀 전까지의 답답함은 사라지고 다시금 활력을 되찾는다. 호객행위를 하던 뚝뚝을 잡아타고 카오산 로드 인근으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간단히 배를 좀 채우고 방콕 도심으로 이동할 요량이었다.



뚝뚝 택시. ⓒ Photo_SUKAVIA



단체 관광객을 실은 대형 버스들과 뚝뚝, 택시와 오토바이로 왕궁 인근은 벌써 교통 정체가 시작됐다. 꼼짝달싹 못하고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중간에 내려 걷기로 했다. 이럴 땐 걷는 게 더 빠르다. 카오산 로드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볼품없던 거리에 조명이 하나 둘 들어오니, 여행자들도 슬슬 거리로 밀려 나오고 이내 활력을 되찾는다. 저녁이 되니, 카오산 로드에 온 기분이 든다. 골목길 앞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맛집이라고 할 것이 없는 카오산 로드다. 대부분 비슷한 메뉴를 내놓고 가격도 별 차이가 없다. 매일매일 어떤 손님들이 오는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유난히 시끄러운 몇몇 식당들을 지나 조금은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다. 주문하는 메뉴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갈증을 풀어줄 맥주, 안주 겸 식사가 될 수 있는 요리 정도다. 태국 음식을 좋아하면 쏨땀이나 똠양, 스프링 롤 정도 더하면 좋다. 대로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오가는 여행자들을 구경하며 맥주로 방콕의 더위를 식힌 뒤, 왓 포 인근 시장 골목으로 다시 이동했다.



카메라 배터리가 나가기 전 찍은 두 장의 사진 중 하나. ⓒ Photo_SUKAVIA



하루종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카메라 배터리가 아슬아슬하다. 돌아가서 다음에 다시 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찍어야 하나. 모처럼 비가 개고 화창한 날씨. 또다시 맑은 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찍어보기로 했다. 왓 포 인근 시장 골목에 카메라를 세팅하고 전원을 켜는 순간, 깜빡깜빡... 

단 두 장의 사진을 겨우 찍고 카메라는 그렇게 전사했다. 꺼진 카메라를 둘러메고 한 동안 그 자리에서 서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원을 마음껏 두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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