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가 조의를 받지 말자
No Condolence
소금 Salt
어제 노래교실에서 <시절인연>을 부르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요즘 가요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곤 한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이 떠나간다고 그대여 울지 마세요. 오고 감 때가 있으니 미련일랑 두지 마세요. 좋았던 날 생각을 하고 고마운 맘 간직을 하며 살아가야지... 친구가 멀어진다고 그대여 울지 마세요 영원한 것은 없으니 이별에도 웃어주세요... 바람처럼 가는 인연. 사람이 떠나간다고 그대요 울지 마세요.' 이 노래의 작곡작사자의 이름을 보니 '알고 보니 혼수상태, 김지환'이다. 침상에 누워있는 엄마의 상태가 연상되는 닉네임이다. 이런 노래가사에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늘 복음송가를 부르던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노래들이지만, 많은 노래가 죽음과 이별에 대한 슬픔과 위로를 담고 있다. 이토록 죽음과 이별은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붙어있는 존재이기에 안 본 척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한 달에 한번 꼴로 장례식장 초대장을 받고 있다. 대부분 지인의 부모님의 죽음 소식을 알리는 부고(訃告,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을 적은 것)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혹은 형식적으로 사용하는 문구가 바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이다. 삼가는 겸손함과 경의의 표시로 사용하며, 조의(弔意. condolence, 남의 죽음을 슬퍼함)는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고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달리 위로할 말이 없을 때 사용하게 되는 문구다.
하지만, 난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내 죽음 앞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지 않길 바란다. 왜냐하면, 죽음이 꼭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과연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난 부고장을 받을 때마다, 축하의 메시지를 이렇게 보내곤 한다. "축하드립니다. 만 가지 번민과 고통이 있는 이생을 떠나 걱정 근심 두려움 고통이 없는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천국행 열차를 드디어 타셨네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요. 저도 곧 갈 테니 기다리세요." 물론, 우리나라의 정서상, 의식상, 문화상,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기에 단지 마음속으로만 그리한다.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과연 좋은 것일까?
Good or Bad, hard to say!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대부분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들은 죽음 앞에서 정신적으로 괴로워했고 심리적으로 슬퍼했고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그렇기에 죽음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그 무엇보다도 최고로 나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죽었을 땐 더 이상 그러한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테니 죽음은 좋은 것이다. 가족들 또한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니 죽음은 그들에게도 좋은 것이다. 엄마의 죽음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아파트 내에서 운동 중에 만난 분이 부모님 안부를 묻다가 자신의 여동생 이야기를 꺼낸다. 이미 죽은 아버지에게 "아빠, 빨리 죽어!"라고 한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는 말을 했다고. 그 동생이 아버지를 돌보았다고 하는데, 아픈 자나 돌보는 자나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나 또한 엄마가 하루빨리 천국에 가시길 바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천국을 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뜻하기에 누구나 쉽게 입에 담기 힘든 말이다. 축복이 아닌 저주의 말로 받아들이곤 한다. 난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면서 이 글을 쓰고 있고 먹고 마시고 운동하고 노래하고 자고 예배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일주일에 두서너번 병원을 방문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매일 병문안을 다닌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죽음은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항해 속에서 가끔은 폭풍우와 같은 고통이라는 놈들을 만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을 기대하기에 인내하며 견뎌낸다. 하지만,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들에게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아무리 수면제와 진통제와 항생제로 진정시킨다고 해도 도무지 회복될 수 없는 상태다.
지난주 엄마의 발톱을 깎고 있는 데 막냇동생이 미국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병문안을 왔다. 엄마가 이곳으로 옮겨온 지 3개월 만이다. 막내아들이 오기까지라도 살아계시길 바랐는데, 다행히 얼굴은 보게 된 상황이다. 동생은 엄마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엄마, 곧 좋아질 거예요!'라고 하는 것이다. 동생은 MRI 박사로서 뇌 과학자이면서 학회에서 <건망증이 치매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 발표를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뇌 과학자이지만, 임종과정에 있는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좋아질 거예요!" 라니...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니, 이건 완벽한 거짓말이다. 죽음을 앞둔 가족에게조차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은 꽤나 나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난 아빠의 죽음을 언급하며 "엄마가 좋아지고는 있지만 곧 아빠가 계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아빠에게 말했듯이 말이다. '천국을 기대하시라고... 이미 오래 사셨다'라고 말이다.
과연 얼마나 살아야 오래 사는 것일까? 동네 이웃의 13세 딸이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진 후, 병원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딸의 장기기증을 서둘러했다. 2주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아이에 비하면 아버지는 얼마나 긴 인생을 산 것인지를 알려드렸다. 아무런 반응은 없었지만, 난 내가 죽을 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난 충분히 아주 오래 잘 살았어'라고 말이다. 인간은 과연 얼마나 오래 살아야 충분히 오래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00세 시대라고 하니 100살이면 충분할까?
문제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의 저승사자는 늘 언제나 너무 가까이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몇 년 전 내가 가르치던 고등학생에게 복음(good news)을 전하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느닷없이 했다. "부모님이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집 현관 밖에 소금을 뿌린다"라고 말이다. 초상집에서 저승으로 가지 못한 귀신이 그들에게 오거나 저승사자가 그들을 데려가는 것을 예방하고자 하는 미신적인 행위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죽음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나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죽음이 왜 나쁜 것일까?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샐리 케이건이 소개한 '박탈이론'에 의하면, 죽음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한 삶을 앗아가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하지만, 오직 나쁜 미래만이 남겨져 있다면 죽음은 오히려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남겨져있는 삶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남아있다.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들의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 뇌사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치매 환자로서 자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러한 삶의 가치를 측정할 기준은 무엇인가? 삶의 가치 여부는 누가 정하는 가? 등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