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결핍이라는 구멍 속에서 발견한 것

결핍과 갈망 그 사이 어딘가에서 쓰는 고백의 글

by 기록하는 슬기


일상을 '계절'로 느끼는 내게 11월은 항상 어렵다. 햇빛 좋은 낮에는 완연한 가을 같다가도 오후 6시가 지나 컴컴해지는 밤이 되면 도저히 가을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어디 즈음인가 보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봤는데, 입동이 11월 7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글의 시작부터 가을이니, 겨울이니 말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추워지면 몸에 열이 없는 나는 에너지가 쉽게 고갈된다는 것, 힘이 쭉쭉 빠지는 몸과 반대로 뇌는 더 팔팔해져서 평소 생각 부자가 생각 재벌이 된다는 것이다.



며칠 전 잠이 오지 않는 밤, 내 머릿속에는 생각 재벌들이 모여 파티가 열렸다. 그날의 주제는 '결핍'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내 결핍에 대해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내가 '갈망'하는 것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내가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봤다.



이것들을 알아채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내 마음이 요동치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이 일직선 양 쪽 끝으로 나누어져 있다면 여기에서 지켜봐야 할 요동의 방향은 '나쁨'으로 향할 때이다. 마음이 아플 때, 화가 날 때, 서운할 때를 잘 살펴본다.



이 마음이 든다는 건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그리던 어떤 상황이 될 수도 있고, 기대하던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안에는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과 목말라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채우고 싶었던 그 무언가 즉, 나의 갈망이 있고 동시에 나의 결핍이 있다.



P20251021_175241903_7307F99F-A66A-4D81-84A1-06CF917E4D6F.JPG 각 계절의 노을도 다르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에는 노을도 쓸쓸해보인다.




나의 요동 속에는 '안정'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물론 내게 수많은 결핍의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중 유독 크고 깊은 구멍을 가진 결핍의 이름은 안정이었다. 3~4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 생활은 줄곧 불안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직업을 구하지 않고 '글'이라는 업을 선택했던 2019년 이후부터 쭉 불안했다.



그중에서도 3~4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글로 돈을 벌기 위한 경제생활을 시작했기에 그 불안감이 더욱 증폭됐다. 단순히 돈을 잘 못 벌어서 불안하다는 개념보다는 전반적인 생활에 돈이 끼치는 영향 때문에 삶 자체가 불안해졌다.



100만 원도 채 안 되는 수입으로 제주라는 타지에서 1년 반을 살아냈다. 물론 본가로 돌아온 후에도 수입은 더 적기도 했고, 조금 더 많아지기도 했지만 결국 내 한달살이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한 달, 한 달 매번 다른 수입은 나란 사람을, 내 일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고 불안정해지면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된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지출이 따른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밥과 술을 사주겠다며 나오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진짜 능력이 없어서 얻어먹는 상황과 충분히 돈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얻어먹는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돈이란 이렇듯 단순히 돈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내 능력, 인간관계, 자신감, 자존감과도 연결된다. 물론 할 말은 없다. 글이라는 업을 선택할 때 이런 상황은 이미 상상했고, 걱정했던 거니까. 알고 선택한 것이기에 이건 내 책임이다. 다만 상상과 경험은 천지차이라는 것뿐.



내 불안의 또 다른 원인은 타인의 관심이었다. 내 일은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취미가 아니기에 나 혼자 글을 쓰는 게 너무 즐겁다고 계속할 수는 없다. 내 글은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고, 읽혀야 한다. 한마디로 많은 독자들이 내 글에 시간과 돈을 소비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매번 그 관심의 정도는 같을 수 없다. 어떤 글에는 ♥ 하트 (공감)가 72개 눌리고, 댓글이 8개 달리기도 한다. 다른 글에는 ♥ 하트 (공감)가 16개 눌리고, 댓글이 하나도 없기도 한다. 창작을 꾸준히 이어나가려면 이러한 숫자에 연연하면 안 되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실천을 또 다른 문제다.



6년 동안 쌓인 경험 덕분에 이전보다는 숫자에 덜 일희일비한다. 그렇지만 내가 하는 일은 타인의 관심을 받아야 하는 일이고, 나란 사람은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난 여전히 내가 쓰는 글이 많은 이들에게 관심받기를, 사랑받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유는 다를지라도 삶에 불안이라는 구멍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나는 나란 인간이 참 신기하기도 하다. 안정 속에서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다며 불안해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해놓고, 지금은 또 그 불안 때문에 안정을 갈망하고 있다.



한 마디로, 나에게 불안이란 자기 자신이 선택하고 만든 결핍이고, 안정은 그에 따른 갈망이다. 불안을 선택하고 안정을 바라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나란 인간은 정말 모순 덩어리인가 싶다.



P20251007_134028672_BB356C2D-8E60-41BF-A704-5134B423E5C8.JPG 불안도, 안정도 결국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많은 심리학자들, 전문가들은 말한다. 결핍은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결핍이라는 게 과연 채워지기는 하는 걸까? 내가 돈을 안정적으로 잘 벌고, 일정한 관심을 받는다면 내 불안이라는 결핍의 구멍은 채워질까. 내가 마음 수련을 부단히 한다면 내 결핍은 여기서 끝이 나는 걸까.



만약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해봐야 한다. 결핍의 구멍이 채워져서 덜 아프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해야 한다. 그렇지만 난 결핍이라는 건 끝이 없을 것 같다. 결핍이라는 구멍에 이름과 그 크기, 깊이가 바뀔 뿐 죽을 때까지 인간은 결핍을 만들고, 없애고, 다시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결핍이 사라지면 원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 사라지면 원하는 것이 바뀐다.' 내가 생각하는 결핍이란 이렇다. 그렇기에 결핍을 대할 때 내가 앞으로 연습해야 하는 것이 있다. 결핍의 구멍을 빨리 채워서 없애려고 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결핍의 구멍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내가 가진 결핍을 결핍으로 인정하는 용기, 결핍에 휘둘리지 않을 뚝심, 그러면서 결핍을 포기하지 않을 의지를 가지고 싶다. 지금은 결핍과 갈망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조금은 무덤덤하게, 그렇지만 무관심하지는 않게 내 결핍과 갈망을 잘 데리고 살아가고 싶다.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11월의 어느 날 밤. 이 수많은 생각들과 불면은 어느 이름의 구멍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가끔은 감당되지 않는 생각들과 불면이 미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생각들을 재빨리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다. 또 그 생각들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는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차근히 바라보려고 한다.

그리고는 인정하고 싶다.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 결핍 따위를 사유하는 사람, 그래서 쓸 수 있고, 쓰고 싶은 사람.'이라고.


결핍과 갈망,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발견되는 나의 개별성을 미워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싶다.

조금은 더 아껴주고 싶다.







오늘은 오랜만에 제 일상 속 생각이 담긴 글을 써보았습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데, 찬 바람이 불면 몇 배로 생각이 불어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누군가는 인생에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한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저의 이러한 생각과 고민들이 글을 쓰게 하고, 이 글이 독자분들에게 닿아 또 다른 힘을 갖게 한다고 믿습니다.


불안이라는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너무 깊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늘만큼은 이 글을 보는 순간만큼은, 불안이라는 큰 구멍을 이해하고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