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지를 명시지로 꺼내오는 법
이전 글에서 경험이 AI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원재료라고 했습니다. 직접 목격한 장면 하나를 공유하는 것이 그럴 듯한 상위 카테고리보다 결과물을 더 크게 바꾼다고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경험은 머릿속에 있습니다. AI에게 전달하려면 그걸 언어로 꺼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We know more than we can tell)."
이걸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합니다. 명시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아는데, 그걸 글로 설명하라고 하면 막막한 것처럼요. 숙련된 의사가 환자를 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그 느낌을 정확히 어떤 근거에서 왔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커플 검사 서비스를 만들 때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커플들이 검사 결과를 받아볼 때 어떤 톤이 좋은지"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 진단적이면 불안해하고, 너무 가볍면 신뢰하지 않고, 따뜻하되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걸요. 그런데 이걸 AI에게 전달하려고 앉아보니, "따뜻하되 근거가 있는 톤으로 써줘"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AI는 이 모호한 지시를 나름대로 해석했지만, 제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충분히 언어화하지 못한 거예요. 암묵지가 명시지(explicit knowledge)로 전환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AI에게 전달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시행착오 끝에 발견한 건, 세 가지 질문이 암묵지를 꺼내는 데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첫째, "이건 왜 아닌가?" 입니다. 원하는 걸 직접 설명하기 어려울 때, 원하지 않는 걸 먼저 설명하면 훨씬 쉽습니다. 커플 검사 리포트의 톤을 설명할 때, "따뜻한 톤으로 써줘"라고 하면 모호하지만, "병원 진단서처럼 쓰지 마. MBTI 재미 테스트처럼 가볍게 쓰지도 마. 친한 선배가 후배 커플에게 조언하는 것처럼 써줘"라고 하면 AI가 범위를 훨씬 정확하게 잡습니다. 제외할 것을 말하는 순간, 원하는 것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둘째, "이전에 이런 걸 본 적 있는가?" 입니다. 경험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말고,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리는 겁니다. "좋은 커플 리포트가 뭐냐"고 물으면 막연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어떤 상담 후기가 정말 좋았는데, 거기서는 갈등을 문제로 프레이밍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표현했어"라고 말하면, AI는 그 구체적인 참조점을 기반으로 작업합니다.
셋째, "이걸 직접 겪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입니다. 내 경험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그 경험을 한 사람의 반응을 묘사하는 거예요. "동거 초기 커플은 사소한 것에 예민해져"라고 하면 추상적이지만, "실제로 한 친구는 상대가 냉장고에 반찬통을 아무 데나 넣는 걸 보고 '이 사람이랑 평생 이렇게 사나'라고 말했는데, 그러고 나서 자기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더라"라고 하면, AI는 그 장면의 감정적 질감까지 포착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의 공통점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언어로 바꾼다는 겁니다. 암묵지는 추상적인 형태로 머릿속에 있습니다. AI에게 전달하려면 그걸 구체적인 장면, 사례, 반응으로 변환해야 합니다. 이 변환 과정이 바로 "경험을 언어로 바꾸는 기술"입니다.
이 챕터에서 우리는 AI에게 없는 세 가지를 다뤘습니다. 이는 욕구, 맥락, 그리고 경험입니다.
종합하자면, 욕구는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는 진짜 이유를 의미하는데, 이 "왜"를 파악하는 것이 AI에게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자기결정성 이론이 말하는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기본 욕구가 그 "왜"의 구조를 보여줬습니다.
그다음으로 맥락을 이야기했습니다. 같은 요청이라도 맥락이 다르면 필요한 답이 달라집니다. AI는 맥락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지만, 상황, 감정, 그리고 관계라는 세 가지 축의 맥락을 명시적으로 전달하면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난 글과 이번 글에서는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AI는 텍스트로 학습했지만, 경험의 질감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질감을 언어로 번역해서 전달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번역을 위해 "이건 왜 아닌가", "이전에 이런 걸 본 적 있는가", "겪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이 도움이 됩니다.
결국 AI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입력은 이 세 가지의 조합입니다. 왜 이걸 원하는가(욕구) + 어떤 상황에서 누가 필요로 하는가(맥락) + 직접 겪어본 사람은 어떻게 느끼고 반응했는가(경험). 이 세 가지가 갖춰지면,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진짜 협업 파트너가 됩니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AI에게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를 다뤘습니다. 문제를 정의하고, 프레이밍하고, 제약을 설정하고, 욕구, 맥락, 그리고 경험을 전달하는 법까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이해한 것을 토대로 실제 AI와 협업하기 위한 기술들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어떻게 판단하고, 개선하고, 함께 다듬어 가는가? 진짜 협업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Barsalou, L. W. (1999). Perceptual symbol system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22(4), 577–660.
Polanyi, M. (1966). The Tacit Dimens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