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역설
하루가 끝났다. 분명히 오늘도 이일 저일 끝내며 바쁘게 살았다.
메일함을 정리했고, 책상 위를 치웠고, 밀린 유튜브 알림도 확인했다. 회의 자료 폴더도 깔끔하게 정돈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오늘 끝내야 했던 보고서는 한 줄도 못 썼다. 내일이 마감인데.
이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바쁘게 움직였는데 정작 중요한 건 손도 못 댄 채 하루가 끝나는 그 묘한 허무함. 우리는 이걸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설명하려 하지만, 사실 시간은 충분했다. 문제는 그 시간을 어디에 썼느냐다.
미루기라고 하면 보통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미루는 방식은 훨씬 다양하다.
첫 번째 유형은 딴짓형이다. 이들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유튜브를 본다. SNS를 스크롤한다. 게임을 한다. 그러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가장 전형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미루는 모습이다. 이때 본인도 미루고 있다는 걸 안다. 다만 멈추지 못할 뿐이다.
두 번째 유형은 생산적 회피형이다. 이 유형은 조금 더 교묘하다. 분명히 뭔가를 '하고' 있다. 다만 그게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닐 뿐이다. 시험 전날 갑자기 방 청소가 하고 싶어지고, 마감 전에 갑자기 이메일 정리가 급해진다. 바쁘게 움직이니까 미루고 있다는 자각이 덜하다. 심지어 뿌듯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그대로다.
세 번째 유형은 완벽주의형이다. 이들은 시작 자체를 하기 어려워 한다. '제대로 할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하자'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어설프게 시작하느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린다. 물론 그런 조건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유형은 결정 회피형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뭘 해야 할지는 아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선택지가 너무 많거나, 우선순위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일단 멈춘다.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간다.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피로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조셉 페라리(Joseph Ferrari)는 1992년 연구에서 미루기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마감 압박에서 스릴을 느끼는 '각성형(arousal)', 실패나 평가가 두려워 피하는 '회피형(avoidant)', 결정을 내리지 못해 멈추는 '결정형(decisional)'이 여기에 속한다.
분류 방식은 다양하지만, 결국 모든 미루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의 불편함을 피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중요한 일은 대개 어렵거나, 모호하거나, 평가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순간 불안해진다. 잘 못하면 어쩌나 걱정된다. 이에 우리 뇌는 자동으로 더 쉽고, 더 즉각적인 보상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예컨대, 보고서는 어렵고, 다 써도 결국 상사한테 깨질 수 있다. 반면, 메일 정리는 쉽고, 완료하면 바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뇌가 할 선택은 명확하다. 메일을 선택한다면 더 즉각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미루는 것은 게으름과 구분된다.
게으름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다. 하지만 미루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딴짓이든, 다른 일이든, 생각이든. 에너지가 없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엉뚱한 곳으로 새는 것이다.
심리학자 티모시 피츨(Timothy Pychyl)은 미루기를 '기분 관리 실패'로 설명한다. 우리는 과제 자체를 피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제가 불러일으키는 불쾌한 감정을 피한다는 것이다. 불안, 지루함, 좌절감, 자기 의심. 이런 감정들이 싫어서 일단 도망친다. 문제는 도망친다고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마감이 다가올수록 더 커진다.
피어스 스틸(Piers Steel)은 2007년 메타분석에서 미루는 행동을 예측하는 핵심 요인 네 가지를 정리했다. 과제에 대한 혐오감, 보상까지의 시간 지연, 낮은 자기효능감, 그리고 충동성. 쉽게 말해, 하기 싫고, 결과는 멀고, 자신도 없고, 당장 눈앞의 유혹에 약한 사람일수록 미룬다.
이건 성격 결함이 아니다. 인간 뇌의 기본 설정이다. 우리 뇌는 먼 미래의 큰 보상보다 지금 당장의 작은 보상을 선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진화적으로는 합리적이었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 환경에서 '나중'을 위해 참는 건 손해였으니까.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그런 환경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UCLA 대학의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사람들에게 '10년 후의 자신'을 상상하게 한 뒤 fMRI로 뇌를 촬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미래의 자신을 떠올릴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타인'을 떠올릴 때와 거의 같았다.
우리는 미래의 나를 남처럼 느낀다. 그래서 오늘의 일을 내일의 나에게 떠넘기는 게 심리적으로 쉽다. 마치 동료에게 업무를 넘기는 것처럼. 내일의 내가 고생하든 말든, 오늘의 나는 편하면 그만이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시간 할인(temporal discounting)'이라고 부른다. 미래의 보상은 자동으로 할인된다. 한 달 뒤에 받을 10만 원보다 오늘 받을 5만 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미래의 성취보다 지금의 편안함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 글은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이기 때문에 당장 해결책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미루기에서 벗어나는 첫 단계는 자신이 미루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도 판단 없이.
"아, 나 지금 미루고 있네." "보고서가 불안해서 메일 정리로 도망쳤구나." "완벽하게 못 할 것 같아서 시작을 안 한 거구나."
이렇게 자기 상태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자동 반응의 고리가 느슨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메타인지'라고 부른다.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 이 시리즈의 마지막에서 다시 다룰 주제다.
이번 글에서는 미루기의 다양한 얼굴을 살펴봤다. 다음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교묘한 유형, '생산적 회피'의 정체를 파헤친다. 시험 전날 왜 갑자기 방 청소가 하고 싶어지는지, 심리학에서는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셀프 핸디캐핑'이라는 개념을 소개할 것이다.
Ferrari, J. R. (1992). Psychometric validation of two procrastination inventories for adults: Arousal and avoidance measures. Journal of Psychopathology and Behavioral Assessment, 14(2), 97–110.
Pychyl, T. A., & Sirois, F. M. (2016). Procrastination, emotion regulation, and well-being. In F. M. Sirois & T. A. Pychyl (Eds.), Procrastination, health, and well-being (pp. 163–188). Academic Press.
Steel, P. (2007). The nature of procrastination: A meta-analytic and theoretical review of quintessential self-regulatory failure. Psychological Bulletin, 133(1), 65–94.
Ersner-Hershfield, H., Wimmer, G. E., & Knutson, B. (2009). Saving for the future self: Neural measures of future self-continuity predict temporal discounting. Social Cognitive and Affective Neuroscience, 4(1), 8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