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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Sep 12. 2021

에스컬레이터에서 내가 발견한 것

이 사진은 도대체 왜 찍었지? 싶은 B컷 사진첩#.4


싱가포르에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같이 여행하던 친구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에게는 하루의 시간이 더 있어서 전시를 구경했다. 그러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폭풍처럼 쏟아지는 비에 우산이 없었던 나는, 동남아에서 내리는 비는 주로 스콜이라 곧 그치리라는 기대를 하며 잠시 안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다음날 바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구경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쉬워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철로 향했다. 우산을 사기엔 돈이 아까워서, 다음 일정은 지하철로만 다니고,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는 곳만 다디 하다 보니 갈 수 있는데 쇼핑몰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이곳저곳 누비면서 지하철을 왔다 갔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싱가포르의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오른쪽만 젖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다 문득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쪽만 젖어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은 보송보송했고, 오른쪽만 젖어있었다. 싱가포르에서는 한 줄 서기를 할 때 왼쪽으로 선다. 우리나라가 오른쪽에 주로 서는 것과는 반대다. 아마 운전석이 반대로 되어있는 섬나라의 사람들은 사회적 규칙으로 인해 왼쪽으로 섰을 것이고, 왼손은 손잡이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산은 오른쪽 손에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에스컬레이터의 오른쪽만 젖어있게 된 것이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을 텐데, 왜 그때 유독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발견에 혼자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었다.


뉴턴의 중력 발견만큼의 대단한 발견도 아니고, 뭐 이리 뻔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겠지만 나름 내게 있어서 이 순간은 늘 ‘관찰의 재미’를 느끼게 된 에피소드로 꼽히곤 한다. 중력도 원래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던 것을 갑자기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위대한 발견이 된 것이니까. 삶의 일부로 너무 자연스럽고도 당연스럽게 녹아있는 것들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는 것. 그 속에서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인생이 너무 평범해서 싫었던 적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매일매일이 새롭고 재밌는 일이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왜 특별하지 않을까, 하면서. 어린 시절의 나는 매일이 특별했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는데. 너무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슬펐던 적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슬픈 건, 더 이상 세상을 새롭게 보지 않는 나 자신이 아니었나 깨닫는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내가 있던 없던, 그 자체 그대로 ‘존재’하기만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얼마나 다른 시선과 다른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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