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Garden Oct 11. 2021

'오징어 게임'은 여혐인가요?

오래전부터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했던 캐릭터의 고민 없는 사용

*이 글에는 오징어 게임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 ‘여혐’이지?


라고 물었을 때, 응, 맞아 라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혐오’라는 강렬한 표현 때문일 수도 있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라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은 대답할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라온 사람들이라면 누군가를 이유 없이 혐오하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 인종차별자이든 성차별주의자이든, 그래 나 맞아, 하고 말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런 사람들 중 실제로 자신이 차별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확률도 매우 높다. 예전에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 화장품 CEO과 그의 남편이 샌프란시스코의 한 부촌에서 낙서하는 필리핀인을 보고, 이곳은 사유지이니 낙서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영상이었다.


자신의 사유지에 글을 쓰고 있는 남성에게 '이곳은 사유지다'며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필리핀인은 해당 저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본인의 집에 글씨를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CEO 너무나 당연하게  이웃의 얼굴로서 드러나는 인종만 보고 이런 부촌에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영상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CEO 말투와 태도였다. 대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폭력적이고, 일명 '싸가지 없이' 말할 것이라는 대부분의 생각과 달리, 그는 아주 ‘교양 있는말투와 행동으로, 자신이 마치 부족한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CEO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순간 자신이 인종차별적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겉보기에는 어떠한 언성도 없이 아주 우아하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있을 것이다. 때론 당신이 옳다고 판단하고 생각한 것이, 누군가에겐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있다는 것을.  



전 세계 넷플릭스를 휩쓸고 있는 오징어 게임의 열풍이 심상치 않다. 누군가는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누군가는 그 정도는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렇게 화제를 쓸어 모으고 있는 작품인 만큼,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란 역시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강력하게 떠오르고 있는 논란 요소는 ‘여혐’이다. 이 작품이 여혐이 맞다, 아니다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이 드라마를 다 본 뒤 느낀 건, 여자 캐릭터를 그리는 데 있어 그다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미녀'와 오른쪽 '새벽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크게 두 명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이북 출신의, 소매치기 소녀 강새벽과 사기꾼 출신의 중년(표현은 중년이라고 했지만, 최근에 아이를 낳은 것으로 그려지는 걸로 보아 사실상 그렇게 나이 든 여성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여기서는 새벽이와의 차이를 두기 위해 편의상 중년으로 쓰고자 한다) 여성 한미녀. 새벽이 에게는 지켜야 할 더 어린 동생과, 아직 이북에 있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 가족을 지키는 것이 삶의 목표인데, 환경이 그렇지 못해서 강하고 억세게 살아왔다. 그래서 과묵하고, 얼굴엔 늘 그늘이 져 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편이라 주인공과도 친밀하게 지내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주인공의 돈까지 훔쳐 달아난 악연의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쓰러운 서사를 부여받은 이 소녀는 큰 인과관계없이 주인공과 한 배를 타는 행운을 거머쥔다.


반면, 미녀는 억센 것은 새벽이 와 다를 바가 없지만, 여기저기 ‘오빠’를 찾으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한다. 한없이 가볍고, 상스럽게도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하는 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외면만 당한다. 특별한 사연이랄 것도 부여받지 못했다. 극 초반에 ‘아이 이름도 못 지어주고 왔어요’라고 한마디를 통해 짐작하는 것이 전부일뿐,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왔는지, 자식까지 둔 엄마로서 어떤 심정을 갖고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일절 보여주지 않는다. 왜 초반에는 그만하자고 울며 빌었으면서, 갑자기 다시 돌아와서는 질에 고작 담배나 숨겨오는 이상한 캐릭터로 변질됐는지 드라마는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질에 뭔가 숨겨올 정도로 굳은 각오를 하고 다시 서바이벌로 입성한 거라면, 그리고 그 정도로 악착같이 살아남길 바라는 여성이라면 차라리 담배가 아닌 다른 것이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여기서부터 ‘어린 소녀’와 ‘나이 든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대충 짐작해본다.


만약 새벽이 같이 어린 여성이 ‘오빠’ 거리며 성까지 팔아 목숨을 부지하려는 캐릭터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더 난리가 났을게 분명하다. 대신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극단적 선택까지 하는 캐릭터는 중년의 미녀가 가져간다. 왜냐? 새벽이 ‘오빠’ 거리며 생존을 위한 것이든 뭐든 성을 팔려고 하면 아마 줄을 서서라도 하려는 남자들이 넘쳐날 것이지만, 나이 들고 추한 - 일명 ‘미녀’ 이름값도 못하는 - 여자가 오빠 거리면 인상을 찌푸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저보다 힘센 남자들이 넘치고 칼부림이 난무하는 세계 속에서 권력 구도는 당연히 남성 쪽이 가져가고 여성은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먼저 남자에게 잘 보이려 몸을 파는 것? 오히려 권력을 지닌, 힘센 남자가 상대적 약한 여자에게 ‘너 내가 살려줄 테니 내게 성을 바쳐라’라고 하게 되지는 않을까? 덕수는 두 번 급식을 받아먹었다고 고발한 여자를 자는 시간에 가차 없이 죽여버릴 수 있을 정도의 무자비한 남성인데, 그런 그에게 성을 팔다가 오히려 죽을 수 있는 건 여자 쪽이 아닐까?


'유미'

하나 더 얘기하자면, 이 드라마엔 한 명의 여성 캐릭터가 더 등장하는데, 짧게 등장하는 이 ‘유미’란 캐릭터는 무려 자신을 희생하고 새벽 이를 살려주는 영웅적 면모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말해 무엇하리, 더 길고 오래 등장하는 주연급의 한미녀에게도 부여받지 못한 과거 서사까지 언급되는 이 여성도 어린 나이의 소녀이다. 유일한 여성 연대인 이 팀은, 한 명이 그냥 힘없이 포기함으로써 드라마 속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인공 기훈과 상우의 어머니들. 한결같이 헌신적이고 상상만 해도 애틋한 존재다. 그리고 철딱서니 없어 보이지만 그들을 언제나 안쓰럽게 생각하는 중년의 남자들. 기훈의 처는 이혼 후 다시 결혼을 했는데, 남자는 재혼도 안 하고 피폐해질지언정 오직 자기 어린 딸을 신경 쓰는 존재이며,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 드라마에서 여성은 어린 소녀와 노모만이 존재한다. 중년의 여성은 살기 위해 몸을 팔거나, 재혼 한 뒤 남편의 돈을 받아 쓰기 때문에 전남편의 어머니가 아픈데도 돈을 줄 수 없는 캐릭터로 나온다.(이 대목에서 옛날 남성 작가의 소설들을 읽었다면 어떠한 기시감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창녀가 된 옛 첫사랑, 제 슬픔도 못남도 다 받아주는 늙은 어머니, 내가 지켜야 했지만 지키지 못했던 가정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진 가장.. 기훈과 상우의 캐릭터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여기에선 말을 줄이기로 한다.)


결국 이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지극히 전형적인, 예로부터 그려왔던(그럴 것이라 믿어왔던) 낡디 낡은 여성 캐릭터 그대로를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시대는 점차 발전하고 있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여성관을 보며 우리는 그것을 ‘여자 혐오’가 아니냐, 고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굳이 여자를 때리고 폭행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만이 여자 혐오는 아니다. 필리핀 남성에게 제 딴에는 친절과 교육을 주려고 한 그 자세, 자기 자신은 교양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취해서 미처 변해가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여성, 노인,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캐릭터를 옛날 관념 그대로, 고민 없이 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니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때는 옳았던 가치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나 때는’ 이게 진실이었는데, ‘원래부터 그랬다’, 혹은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네가 예민한 게 아니냐’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게 진정한 우리 시대의 꼰대가 되어가는 길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원한 22세”, 가상 인간에 녹아든 인간의 열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