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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Feb 17. 2021

기록학 공부하면 기록 잘하나요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면, 글을 쓰지 않으면 된다.”


영문과 나오면 “영어 잘해?”, 중국어과 나오면 “중국어 잘해?”라고 묻는 것처럼 의미 없는 질문이 없지만, 기록학을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런 류의 질문을 받곤 했다. “정리 잘해? 매일 기록해? 기록 되게 잘하겠네?” 물론 기록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의미 없는 질문인지 잘 알 것이다. 기록학과에서 배우는 기록은 일기나 메모 같은 기록이 아니라 공공기록법에 의거한 공공기록, 공공기록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질문은 남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가끔 나를 괴롭혔다.     


기록학 공부 하는데, 기록 좀 하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기록학 공부 하는데, 내 책장이 너무 정리 안된 것 아닌가. (무슨 상관...)

기록학 공부 하는데, 컴퓨터에서 파일 하나를 제대로 찾을 수 없다니.      


  원래도 기록을 많이 하긴 했다. 매일 일기를 쓰니까. 아니, 매일은 못쓰고 가끔 미뤄서 한꺼번에 일기를 쓰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록의 4대 속성을 배웠다.      


  4대 속성이란 진본성, 신뢰성, 무결성, 이용가능성이다. 여기에서 신뢰성은 기록이 입증하는 활동이나 업무 처리가 완전하고 온전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라 믿을 만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성은 기록을 생산한 사람이 실제 행위자인지, 행위 직후에 기록된 것인지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의 일기를 내일로 미루면? 내 일기 기록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이런 논리로 쓰지 않는 나를 계속 귀찮게 했다.      


  강박이 생기니까 일기고 뭐고 아무것도 기록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한동안 공부를 핑계로 일기고 블로그고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매주 써야하는 리포트만으로도 바빴고, 이미 충분히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면, 글을 쓰지 않으면 된다.” 


  '글을 쓰기가 싫어요'라는 말에 누군가 저렇게 답한 글을 보고 '아니 이런 성의 없는 조언이 있나' 싶었다. 뭔소린가 했던 저 문장이 요즘 마음을 후벼 팠다. 글을 쓰지 않으니까 너무 빠르게 흘러 가는 시간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디까지 걸었고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흔적을 남기지 않으니, 계속 무중력 상태로 걷는 것 마냥 막막한 기분도 들었다. 역시 괜찮지 않네.

      

  며칠 전, 평생교육원에서 공부할 때 메모처럼 써둔 내 블로그 글을 봤다. 정말 사소한 이야긴데도 불구하고 ‘내가 저 때 저런 생각을 했구나’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별 것 아니지만, 어떤 글은 미래의 나에게 말을 건다. 그래서 다시 써보기로 했다. 눈뜨자마자 책상 앞에서 시작해, 온종일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별일 없는 대학원생의 기록을. 

      

  더불어 내가 왜 대학원에 왔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적어보고 싶다. 나는 엄청나게 깊은 고민 끝에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고 여전히 헤매고 있는 중이다. 이공계 대학원생처럼 실험실도 없고, 조교도 뭣도 하지 않아 교수님과의 짜고 쓴 스토리도 없다. 누군가에게 유용할 정보 같은 건 없을 테지만, 무미건조한 대학원 생활의 흔적 하나는 남겨야겠다. (무엇보다 친구 M의 적극적인 권유가 다시 글을 쓰고 올리는데 큰 몫을 했다.)


  뭣보다 대학원인줄 알고 갔는데 알고 보니 싸이버대학이었던 2020년 입학생들의 슬픈 썰, 그거라도 풀어야지. (일단 눈물부터 닦고...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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