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루양 Feb 18. 2021

졸업하면 마흔, 대학원에 등록하다

거기서 거기였던 회사에서 대학원까지의 대서사시

진짜 배움은

현장에 있는 거 아닌가요


2020학번. 사실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학번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30년 인생 내내 내 모토는 학교 탈출이었는데. 물론 대학교는 재미있게 다니긴 했지만, 학생 신분이라는 게 늘 무언가의 ‘준비’처럼 느껴져 마뜩치 않았다. 


4학년 1학기부터 ‘졸업예정증명서’를 떼서  작은 기획사에 인턴으로 취직한 적도 있었다. 졸업식날도 남의 일인 양 출근했던 날이 떠오른다. 등록금은 비싼 데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 학교는 내게 결코 안전하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실 밖 창문만 내다보던 학생이었다. 학교 울타리가 철창 같았다. 모눈 종이에 짜인 시간표는 보기만 해도 갑갑했다. 이런 나에게 대학원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미래였다. 나의 배움은 언제나 학교 밖, 현장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에게 대학원에 가려는 사람들은 1) 사회생활에 준비가 덜 됐거나 2) 학교 안에서 취업을 하려는 자 (즉, 교수가 되려는 자)라고 여겨졌다. 대학원을 진학하는 데에 3) 진로를 바꾸거나 4) 하던 일에 전문성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회사의 만족도는

업무, 동료, 나의 태도


  학교 도서관에 갈일이 없다는 것 빼고 아쉬운 것 하나 없던 대학 졸업.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필 문화예술에 뜻이 있어서, 인턴 생활로 처음 번 돈은 40만원이었다. (물론 무려 10년 전 얘기다) 그렇게 극장에서 구르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을 했다. 잠깐 이직을 할 때마다 멈춰섰지만, 그렇게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면서 일을 배웠다. 


  회사 초년생일 때는 ‘회사는 거기가 거기’라는 회의감 짙은 선배들의 말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그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비슷비슷하게 일을 배운 사람들이 상사가 되고 대표가 되어 비슷비슷한 시스템을 만들고, 다시 비슷비슷하게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회사는 그랬다.      


  10년 동안 네 번의 이직을 하면서 대기업에도, 중간 규모의 기업에도, 단 세 명이 일하는 회사에서도 일해 봤지만, 회사는 정말로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그 일이 어떤 일이냐에 따라 나의 업무 만족도, 성취도가 달랐을 뿐. 대신 이거 하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직장 만족도는 회사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맡은 업무, 나의 동료, 나의 태도에 많은 것이 결정된다는 것 말이다.      


  퇴사가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올해 102세 넘는 김형석 철학교수님은 ‘만족’이야말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첫 번째 덕목이라고 하셨는데, 나에게 바로 그 덕목이 없었다. 일을 열심히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두 가지 문제였다. 하나는 5년차가 되었는데도 내가 내 일에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 두 번째는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만든 결과물이 보람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아서 내가 좋아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퇴사는 내가 맡은 업무, 나의 동료, 나의 태도, 어느 것에서도 나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 이후에 이직한 작은 스타트업 회사는 두 번이나 문을 닫았다. 이 정도면 회사 체질이 영 아닌가 싶었고, ‘과연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뭘까’ 같은 질문은 지루하다 못해 따분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회고해봤을 때, 나는 글이든 영상이든 계속해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해왔고, 그 일 자체가 싫어서 회사를 그만둔 적은 없었다. (여전히 글 쓰는 일을 좋아하고, 촬영은 사랑하고, 내 손으로 만든 콘텐츠를 얼마나 사랑하능데!!!)


 그러니 이 일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 어디서든... 지금도 당장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쉬는 동안 유튜브를 제작해 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외주를 받아 작업하는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일주일 만에 알았다

사서는 어려울 수도 있겠어


  "도서관에서 일하면 어때? 좋아하잖아." 도서관에서 일하는 분들이 웃으면 코웃음칠 얘기지만, 그땐 친구의 말이 왜 그렇게 혹하게 들렸는지! 도서관으로 출근하면 무슨 일을 해도 낫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도 ‘업무, 동료, 태도’ 중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다.) 사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대학원은 나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선택지였다.      



  고민 끝에 평생교육원에서 사서 자격증을 빠른 시간에 저렴한 학비로 취득할 수 있다는 걸 알게됐다. 그렇게 평생교육원에 입학한 게 2년 전 일이다. 확인해보고 싶었다. 사서라는 업무가 괜찮을지, 무엇보다 내가 지금 공부를 다시 시작해도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 말이다. 

    

  대형 강의실에 40여명 학생이 빼곡이 앉아 수업을 들었다. 맨 끝자리 문 앞이 내 고정석이었다. 수업은 교수님이 불러주는 프린트 물의 빈 칸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여러 과목 중에서 도서관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서지학 과목이 재미있었다. 나머지는....... 사실 평생교육원은 자격증을 따겠다는 목적이 분명한 교육기관이라 공부를 재미있게 한다든지, 깊이 있게 배움을 접하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시험 대비반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 만에 알 수 있었다. 사서라는 업무가 나에게 안 맞을 수도 있겠구나! 이 공부는 결코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낸 수업료가 있기 때문에 한 학기는 책임을 져야 했다. 나처럼 뒤늦게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 오래 가정만 돌보다가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 대학을 막 졸업한 사람 등등 정말 다양한 배경,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이 모여 수업을 들었다. 서로 낙오하지 말자고 다독이고, 간식을 나눠먹고, 짝꿍이 생기고 나니 학교도 다닐만 했다.      


  이때 공부를 하면서 도서관 업무에 관한 인식이 바뀌었다. 사서의 업무는 책 속에서 혼자 일하는 직업이 결코 아니라 그야말로 전문 서비스이다. 책을 좋아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을 싫어하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교수님마다 강조했다. 동시에 행사를 기획하고 홍보도 해야 하고, 동시에 육체노동도 마다 않는... 그런 (역시 직장이란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만 공부를 계속할수록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이것은 학문계의 

탐사보도 같은 건가


  한국 최초의 도서관이 어디인가, 부산인가 평양인가 논쟁을 다룰 때 혹은 어느 지역에 도서관이 많이 생기는지 정치와 공약으로 살펴보았을 때, 재미있는 논문을 접하곤 했는데 대개 기록학과에서 나온 논문들이었다. 최초가 언제 어디인지, 도서관과 정치, 선거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기록을 통해 설득하는 글이었다.      


  모든 게 뿌연 책상 한 켠에 내리쬐는 이 명확함이라니. 기록학이라. 기록학. 기록학이란 무엇일까?! 그때부터 기록학을 곱씹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견 학문계의 탐사보도 같은 것인가. 출처에 기반해 사실을 정리해나가는 학문이라니. 이제까지 해온 일하고도 꽤 연관이 있어 보였고, 무엇보다 명확한 기록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제작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생기기까지 했다.      


“나, 기록학 공부를 해볼까?”     


이 생각을 하고도 한참을 고민했다. 대학원을 가고 싶지 않아서 평생교육원에 등록한 건데, 다시 대학원이라니?! 그래도 이번에는 자격증이 목적이 아니라 진짜 공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고민하다 전 직장 선배에게 슬쩍 물었더니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며 권했다. 남편도 계속 나를 북돋았다.


 “나 졸업하면 마흔인데? 마흔에 졸업장 들고 또 새로운 일 시작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땐 분명 지금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 어딘가 취직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고민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그건 꽤 근사한 설득이었다. 

때로는 나보다 누군가의 강력한 확신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기도 한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두고, 고민 끝에 대학원 지원서를 냈다. 교육원의 기말고사는 보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돌아오게 될 수도 있으니까, 보험용으로라도 성적은 받아두라고 짝궁 언니가 신신 당부했지만, 나로서는 보험도 만들어두고 싶지 않았다.      


이제 목적지를 향해 가야지. 노빠꾸 할 거야. 대학원 면접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비장하게 마음을 먹었다.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온 것일까. 이게 내 길이 아니라도 옳은 선택으로 만들고 싶다. 정말 떨리는 손으로 등록금을 입학했다. 다시 학교에 가게 되다니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그러니까 때는 2020년, 모든 대학이 코로나 싸이버 대학으로 바뀌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보다, 기록학이 정말 뭔지도 모르고...          


 

2019년의 나여... 


매거진의 이전글 기록학 공부하면 기록 잘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