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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부캐 전성시대, 장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

by 황여름

"부캐 전성시대"


이 말조차 이제는 한철 지난 유행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부캐라는 개념이 언제부터 인기였던 것일까 궁금해 검색을 해봤더니 모 종편에서 2021년 '부캐 전성시대'라는 메타버스 부캐 예능을 했던 적이 있었다. TV프로그램으로 방영하기까지 시간이 꽤 소요되기 마련이니, 이미 부캐라는 것은 2021년 이전부터 유행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잠깐 나의 학창시절로 돌아가보면, 고등학생때 정은궐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라는 소설이 인기였다. 정은궐 작가는 필명이고, 그인지 그녀인지 밝혀지지 않은 작가는 다른 본업이 있고 외부에 알려지기를 극도로 꺼려해 인터뷰조차 서면으로 밖에 안한다는 소문이 인터넷 상에서 떠돌곤 했다. 실로 대단한 정체를 숨기고 일상생활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던 첫 순간으로 기억한다.


나조차도 블로그나 브런치 세상에서 글을 쓰며 나만의 세상을 조금씩 구축하고 있다. 부캐가 좋은 점은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콘텐츠를 생산하며,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브랜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는 형태에 대한 이론이다. '부캐'에 대한 이야기는 보드리야르의 이론 중 하이퍼리얼리즘에 해당하는 사례로, 하이퍼리얼리즘은 말그대로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가상현실을 의미한다. 실제로 웹툰 작가나 유튜버, 인플루언서 등 새로움을 양산해 내는 부캐는 그들의 단순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년에 SNL에서 나온 '동호회의 목적'이라는,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러닝 크루를 패러디한 코너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실제 러닝 동호회를 극단적으로 풍자한 코미디로 인기 많은 남자를 만나고 싶지만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남미새', 여자를 만나러 동호회에 왔지만 그렇지 않은 척을 하며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여미새'와 같은 캐릭터가 나온다. 이는 현실에서 존재할 것 같은, 누군가에게 어디선가 들어본 동호회의 인물이다. 이런 극단적인 캐릭터를 통해 사람들에게 러닝크루의 강한 정체성을 심어주고 그 캐릭터 자체로 인식하게 한다. 실제 러닝크루를 하는 사람들(원본)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캐릭터가 되어 대중들은 '남미새', '여미새' 캐릭터를 실제 현실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로 느끼게 된다. 이는 장보드리야르의 "진짜 같은 가짜"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본 모습과 부캐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람들은 그 부캐를 통해 만족감을 느낀다.


한편, 문화의 소비에 대해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내용의 한 유튜브 클립이 생각났다. 점차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가 상류층으로 한정된다는 내용이었다. 문화를 누리는 것 조차 부익부 빈익빈이 된 시대. 돈이 없는 사람은, 의식주에 돈을 쓰기 바쁜 사람들은, 대체 현실을 현실처럼 소비하며 쾌락을 추구하는 미래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니 뮤지컬이며 내한콘서트며 운동을 하는 것 조차 제법 큰 돈을 들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문화를 소비할 비용이 없는 사람들은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가짜 현실 속에서 유튜브, VR, 메타버스, 게임과 같은 시뮬라시옹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생각해보았는데, 어쨌거나 이런 시뮬라시옹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졌기 때문에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시뮬라시옹을 가난의 문화로 볼 것이 아니라 문화의 접근성 확대, 불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창구, 현실의 탈출구와 같은 긍정적인 역할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가상 현실이 순기능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의미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도박, 성적 쾌락, 중독 등 대체 현실의 치명적인 단점 개선 및 윤리적 운영을 통해 순기능이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제 <오픈ai CEO 샘 올트먼 "10년 내 인간 수준의 ai 등장한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10년 안에 사람과 맞먹는 수준의 범용인공지능(AGI)가 등장할 것이란 내용이다. 이처럼 ai가 인간을 능가하는 미래가 머지않아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ai나 가상현실과 같은 것들이 인간들에게 순기능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제도적 절차를 잘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은궐 작가에서 시작해 오픈ai 샘 올트먼으로 끝나는 글이 웃기긴 하지만 오랫동안 끝마치지 못했던 글을 오늘은 어떻게든 마무리하려 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고 한다. "정보는 점차 늘어나고, 의미는 차츰 줄어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문장은 현실을 초월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부캐들에게도 필요한 사고가 아닐까 싶다.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나만의 철학이 아닌, 의미가 담기지 않는, 영혼이 없는 것은 한 순간에 무너질 모래성과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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