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 선생님 이야기
지난번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드디어 첫 수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면접을 보기 위해 한 번, 계약서를 쓰기 위해 한 번 와봤지만 햇빛 초등학교는 정말 신기한 곳에 위치해있다. 2차선 도로를 가운데 두고 커다란 논을 바라보고 있는 초등학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흔한 편의점이나 문구점은커녕 주변에는 논과 밭, 그리고 몇 채 되지 않는 가정집이 전부다. 올 때마다 이 황량함에 놀라기도 하지만 이곳 학생들은 방과 후에 친구들끼리 간식 하나 사 먹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어릴 적 학교가 끝난 후 학교 앞 분식집에서 컵 떡볶이와 튀김을 사 먹는 재미로 학교다녔던 나였기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버스를 타고 학교 앞 정류장에 내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가르치고 학원에서 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것만 해도 몇 년이지만 지난 8년간 나는 내 공부만으로 벅차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없었다. 공부하는 동안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겁부터 먹고 안 하겠다고 했던 겁쟁이의 최후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면접 볼 때의 그 호기로움은 어디로 갔는지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심장이 뛴다.
햇빛 초등학교는 2층짜리 작은 건물로 한 학년에 겨우 두 반뿐인 교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긴장했는지 학교로 들어가는 보행로를 지나쳐 운동장을 횡단하고 있었다. 그때, 면접 볼 때 뵀던 교감 선생님께서 지나가시면서 한 말씀하신다.
“선생님, 운동장은 다니는 길이 아니죠? 다음부터는 저쪽 보행로로 오세요.”
아이고, 첫날부터 혼났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전에 선생님께 혼나는 선생님이라니. 정말 면목이 없다. 가뜩이나 긴장해서 굳은 얼굴이 이번에는 빨갛게 변했다.
사전에 들은 대로 학생들과의 수업을 할 도서실로 향했다. 도서실에 계신 사서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오늘 아이들과 수업을 할 교재를 살펴보았다. 내가 가르칠 아이들은 3학년 아이들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연초에 있는 학업성취 평가에서 기준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아 2학년 교재로 수업을 시작한다. 읽기와 쓰기가 부족하고 아직 손가락을 이용해 덧셈과 뺄셈을 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공부의 재미를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일이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문제집을 살펴보고 있을 때, 담당 선생님이신 체리 선생님이 아이들 네 명을 데리고 오셨다. 눈이 예쁘고 명랑한 유라와 통통하고 귀여운 소은이, 내성적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주연이, 그리고 유일한 남학생인 씩씩한 승훈이. 이렇게 네 명이다. 아이들은 얼른 인사를 하라는 담당 선생님 말에 제각각 명랑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아이들과 똑같이 존댓말로 인사를 했다. 체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해주시고 바로 교실로 돌아갔다.
아직 어색한 아이들과 함께 도서실 책상에 앉아 멀뚱거리고 있으려니 더 긴장이 된다. 원래라면 아이들에게 내 소개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설명해야 하는데 어쩐지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
맞은편에 앉아 긴장하고 있는 나를 아이들도 눈치챘나 보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승훈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나를 부른다.
“선생님!”
“어, 왜?”
“선생님 긴장했어요?”
내 속을 들킨 것 같아 뜨끔하다.
“네, 선생님은 오늘 여러분과 첫 수업이라 조금 긴장했어요. 여러분도 선생님이 처음이라 긴장되죠?”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서로 대답하냐고 난리다.
“저는 하나도 긴장 안 되는데요? 저 이거 2학년 때도 해봤어요.”
이 친구들 모두 2학년부터 방과 후 교실 경험이 있단다. 아이들이 이 수업에 대해 잘 알고 있겠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나도 긴장이 풀려 아이들에게 준비했던 인사를 했다.
“여러분, 선생님은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일주일에 두 번 이렇게 도서실에서 수업을 할 거예요.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많이 도와줄 테니까 우리 열심히 합시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알겠다며 대답한다. 긴장했던 첫 수업이 아이들 덕분에 편해졌다. 내가 가르치러 왔는데 아이들에게 이렇게 또 하나 배운다.
처음부터 친해지는 관계는 없다. 이렇게 서로 얼굴 보며 웃다 보면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을 공유하는 관계가 된다. 드디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