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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l 17. 2022

13 고모는… 정수리가 귀여워

고모일기, 22/07/17

루이가 올해 부쩍 성장한 게 느껴져. 신체 뿐 아니라 정신도. 지금까지와 다르게 너한테 서운한 말도 할거야. 그렇지만 아직 다 알고 하는 말은 아닐테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


지난 주말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아빠가 하신 말씀을 나는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나와 루이가 좀 유별나게 서로를 좋아한다 말씀하시곤 한다. 손자가 말할 수 없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한편, 제 자식 없이 조카에게 애정을 쏟는 딸에 대한 마음이 복잡하신 건 아닌가, 나는 가끔 넘겨짚곤 한다. 그럼그럼. 아직 어린이인걸. 서운해하지 않아~ 하고 아빠 말에 가볍게 답했다. 당연하고 뻔한 얘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런 문제에 있어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루이는 6월 중순 토요일에 제 아범과 둘이 우리집에서 한나절 놀고 갔다. 그때 루이 아범이 말하길,


집에서 우연히 가족의 귀여움 순위를 말하게 된거야.
루이한테 물어봤는데, 1위는 엄마, 2위는 아빠, 3위는 (이모) 할머니, 4위는 외할머니, 5, 6위는 이모 할머니네 삼촌들이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물었지. 루이, 그럼 고모는? 고모는 몇 위야?
그랬더니 100위라더라고 ㅋㅋㅋㅋㅋㅋ
누나는 안 귀엽대.


외삼촌은 500위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소 자신감을 회복하고(?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루이가 귀여워 좀 놀려보기로 했다.


루이, 그러면 고모 얼굴 안에서는 어디가 제일 귀여워?


라고 물었더니, 자기 정수리를 가리킨다. 나는 정수리가 얼굴에서 제일 귀여운 사람이다. 너무 웃겨서 좀 더 놀리려고, 아니 그건 얼굴이 아니잖아, 내 얼굴 안에서는 어떤데? 눈? 눈 어때? 그랬더니,


고모 눈 안에 빨간 선이 이렇게 이렇게 있어서 무서워.


당황한 루이 아범은 루이야, 아빠 눈도 충혈되어 있잖아, 라고 말했다. 누나를 위한 다정한 시도였지만, 오소년아(루이 아범을 부르는 내 애칭이다. 새벽 5시의 소년이라는 뜻으로, 재작년 추석인가, 부모님 댁에 가는데, 차 막히는 게 너무 싫다며 온가족을 깨워 다섯시에 출발하자고 해 서울 식구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기원이다. 너는 괜찮겠지. 다섯시에 일어나고 아홉시 반에 자는 어른이니까. 쳇), 눈 웃음이 귀여운 네 눈은 충혈된 흰자를 온전히 보여주는 일이 거의 없단다. 그래도 시도는 좋았어. 고맙구나. 역시 혈육이 최고다.


이 정도는 나를 서운하게 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우리가 못 만난지는 얼추 한달이 되었다. 그새 몇번인가 페이스톡을 했다. 페이스톡을 하면 냥코대전쟁의 세계관에 푹 빠진 루이는 기린고양이, 황소고양이로 분해 나에게 레이저를 발사하고 카메라 너머로 주먹을 날렸다.


엊그제는 루이가 너무 보고 싶어 내가 영상통화를 청했다. 부쩍 볼에 살이 올라 제 아범 어릴 적 같은 얼굴을 연상시키는(살이 빠지면 올케 얼굴에 더 가까워진다) 루이는 너무나 반가운 표정으로 늘 그렇듯 배틀을 시작했다. 배틀이 살짝 지겨워진 나는, 토요일에 아빠랑 고모 집에 놀러오지 않을래? 하고 넌지시 물었다. 당연히 온다는 답을 할 줄 알았는데, 왠걸. 루이는 곤란한 질문을 대할 때 그러하듯 답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 점이 마음에 좀 걸렸는데,


어제 오전에 다시 영상통화를 하는 루이 표정은 분명 반가움을 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카톡으로 내가 우리 다음에 언제 만나냐고 질문을 던졌는데, 이번에도 답이 없다. 나는 좀, 당황했다. 이렇게 우리도 서서히 멀어지는걸까? 나와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우리 특별한 관계가 자연스럽게 저물어가는 걸까? 나는 조금 서운하고 그보다 조금 더 서글퍼지려 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남자친구에게 말하길 잘했다. 그는 자기 경험을 곁들여 의견을 주었다(그는 일곱명의 조카를 두었다).


그렇다면 자기 부모와는 더 거리를 두었겠군. 자기도 자기가 낯설고 감당이 안될 수 있어. 변화가 많은 시기잖아. 당신을 만나기 싫다기 보다는, 어째야 좋을지 몰라서 그렇게 얼버무렸을 수도 있어.


나는 이 말에 설득되기로 했다. 일곱살이라. 나는 수없이 많은 두려움과 매일 사투를 벌이는 일곱살 시절을 보냈다. 대개는 허구의 상대였으나 그건 지금에나 하는 말이다.


일곱살에 유치원에 가면서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불현 듯 엄마 생각이 났는데, 그 순간은 참았지만 그 다음부터 유치원에 가면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이 골칫덩이 학생을 이렇게 달래고 저렇게 달래봤을 선생님은 어느 날, 어린이들이 선생님을 둘러싸고 앉는 카펫 자리 위에서 내 한 팔을 붙들고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아팠던 기억은 없지만 당시 내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지로 아직 내 머릿 속에 남아있다. 여하간, 나는 대적해야 할 나만의 문제와 걱정으로 버거운 어린이였다.


루이는 다르다. 어린이집에 잘 적응해냈고, 엄마 아빠와 떨어져도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아기였으며 이젠 어린이가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가령 죽음 같은)이 때로 그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드리우지만 그건 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운할 일이 아니다.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으로 커나가는 이 사람과 함께 하자. 그가 찾을 때 곁에 있어주자. 원할 때 배틀을 하고 원할 때 이야기를 나누자. 가끔 원하지 않더라도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자. 지금까지보다는 좀 더 수동적으로 그의 세계에 자리하자. 그의 태양계 안에 조용히 있어주도록 하자. 서운할 일이 아니다.


나와 그를 위해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뇌인다. 스스로 잊지 않도록 되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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