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일기, 22/10/15
토요일 저녁을 루이와 단둘이 보냈다. 보통은 ‘애를 봐줬다’고 말할 것이다. 루이 부모가 외출한 다섯 시간 정도가 될 것이었다. 저녁밥도 이미 먹였기 때문에 특별히 어려울 건 아니었다. 의외로 단둘이 있는 건 두 번 째다.
저녁 먹었나?
네시 쯤 이른 저녁을 먹었다. 외출 전에 루이 부모가 맡기로 한 일이었다. 아직 배가 안 고픈 루이가 이따 먹으면 안되냐고 투덜하길래, 너도 알다시피, 고모는 아기 밥은 못 먹이잖아. 하며 지금 먹을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루이는, 한번 해봐~~~ 라고 응수했다(정말 물결이 있는 말이었다). 예기치 못한 반격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라서 흠칫. 여하간 오늘은 아니다. 안된다. 난 못하니까.
테레비에서 괴도조커를 신나게 보고 난 루이가 다음과 같이 말한 건 7시 50분 경.
우리 저녁 먹었나?
처음엔 무슨 뜻인지 이해도 못했다. 가까스로 배고프다는 의미를 깨닫고 집에 있는 스낵을 찾아드리고 내 간식으로 가져온 빵과 송편을 나눠먹었다. 배고프다는 말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배고프다는 말이 이렇게 파안대소 할 말이던가. 새삼스럽다.
고모 꿈을 꿨어.
늘 그렇듯 둘이 이런 저런 놀이를 했다. 루이의 놀이는 끝이 없다. 모든 게 놀이니까. 불현듯 지난 번에 꿈에 고모가 나왔다고 했다. 내가 뭘 하더냐고 물으니 몰라, 하고 수줍게 웃는 걸로 봐선 기억하지만 말하지 못할 일인가 싶다.
루이는 외출한 가족이 귀가한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나란히 루이의 모기장 안에 누웠는데, 같이 자니까 우리는 같은 꿈을 꿀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만 녹아내리고 말았다. 이렇게 낭만적인 말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인간의 뇌는 신비스러운 공장이다. 뭘 만들어낼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물론 같은 공장에서 고모를 발가벗겨 챙피하게 만들어 울릴 생각이라든가, 고모를 대머리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것도 생산해내긴 한다… 일곱살의 머릿 속에서 띠디디디 퉁탕퉁탕 만들어진 말의 재료와 공정이 궁금해진다. 솔직히 너무 사랑스럽다.
루이는 그렇게 누워서 한참이나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토당토 않기도 하지만 너무 졸려서 기억은 안난다.
다음 날 아침 내 발치에서 잠이 깬 루이는 화장실에 갔다 제 엄마가 누워있는 침대에 올라가서 잠시 있었다. 그 다음에 내 옆에 누워서 조물조물 나를 만진 것처럼 애정표현을 했으리라. 그러더니, 어제 꿈에서 3단진화(냥코 용어다)를 했어. 내가 너무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꿈에도 나왔나봐. 한다. 우리는 아무래도 각자의 꿈을 꾸며 잔 것 같다. 나 역시 내 첫 사수가 끈질기게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기분으로는 밤새 시달린 것만 같다). 그래도 같은 꿈을 꿀거라는 말은 세상 달콤했어, 루이.
브래드 이발소와 버터
아침을 먹고 이제 그만 귀가하려는데 루이가 나와 브래드 이발소를 같이 보고 싶다고 했다. 뮤지컬이었다. 그날 오전 이 가족의 일과였다. 표가 없어 못 갈것 같다고 하자 루이 아범이 자기 표를 양보하겠단다. 추억이나 만들라는 말이 왠지 나를 움직였다. 루이 아범이야말로 브래드 이발소를 좋아하는데… 덕분에 루이 바람대로 같이 뮤지컬을 봤다.
루이는 이미 등장인물과 주요 노래를 다 꿰고 있었고 전개될 이야기도 짐작했다. 노래를 기억 못한다고 타박 맞은 건 덤.
한편, 전날 밤 둘이 놀면서 그림을 좀 그렸다. 스케치북을 넘기는데 브래드 이발소의 버터를 그린 그림이 너무 귀여워서 몇 번이나 탄복했다. 루이는 아빠가 안 닮았다고 했다며 자신 없어했지만 루이야, 닮고 안 닮고는 둘째 문제다. 작가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세상을 그린다고 들었거든. 이건.. 이건 정말 좋은 그림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로 그자리에서 핸드폰 배경화면을 교체했다. 지금도 핸드폰만 켜면 그림 때문에 웃는다. 쉽게 그리고 표현력이 제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