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역사와 현금을 대하는 자세
당신의 돈은 안녕하십니까?
철수는 작년에 취업을 했다.
몇 달 간 월급을 다 쓰면서 재미있게 살았지만, 실시간 검색어에 무슨 적금이 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슬슬 나도 돈을 모아볼 때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적금을 가입하러 은행에 갔다. 연이율 2.5%. 특판이라 우대금리가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가입 기한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다시 없을 좋은 기회라고 한다. 월 납입액을 처음 생각한 50만원의 두 배인 100만원으로 설정하며 이제 돈 좀 모아보자며 다짐한다.
착실히 3년 넣다보니 만기가 되었다. 돈을 찾으러 은행을 가보니 적금을 가입할 때는 없었던 창구 직원이 사글사글하게 웃으면서 은행 예금 상품을 알려준다. 당장 쓸 생각도 없고 해서 알려주는 예금 상품에 돈을 다시 예치하고 나왔다.
혹시 철수와 같은 경험이 있는가? 이 글은 이제 돈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나와 당신과 철수를 위해서 쓰는 글이다. 어려운 말 없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0살 직장인이 알아야하는 만큼만. 뭐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지나가다 들린 누군가에게 작은 공감이나마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 첫번째 주제는 '100만원짜리 적금, 들지 마세요' 이다.
철수는 이제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인데 월 100만원의 적금을 든다면 거의 모든 저축여력을 적금에 쏟는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게 현명하게 돈을 모으는 방법일까? 가장 먼저 자산을 대하는 마인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세계의 온갖 사연이 있는 자금이 모인다는 스위스 은행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은행과 다른 점이 있다. 절대로 고객에 대한 정보를 누출하지 않는 대신 일정의 보관료를 받아간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출처의 썰에 따르면 어떤 스위스 은행원은 해외에서 고객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 그 나라 감옥까지 들어갔단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 거액의 위로금을 받았다나 뭐라나. 저걸 잘 했다고 해야 할지, 나쁜놈이라고 해야할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떠오른다.
돈을 주면서 돈을 맡긴다고 하면 흔히 느와르의 검은돈이나 독재자의 사금고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도 돈을 맡기면 일종의 보관료를 내고 있다. 우리는 마약을 팔거나 언론을 통제하는 대신 월급 쪼개서 밥값 아껴가며 꾸역꾸역 돈을 모은 죄밖에 없는데도 말이다.(억울해 죽겠네)
혹자는 '아닌데? 나는 적금 이자 2.5% 받으면서 3년 만기로 모으고 있는데?'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도 누가 보관료 명목으로 돈을 떼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돈의 가치가 계속 줄어들어 가는 것은 분명하다. 보통 장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으 재미없어라. 돈의 역사라니 으으으. 나는 훨씬 실용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개념적인 이해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서 서문을 열었다. 돈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바뀌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면 돈을 다루는게 좀 더 쉬워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돈의 역사를 설명한 좋은 컨텐츠가 참 많다. 많이, 깊이 알고 싶다면 조금만 찾아보아도 많은 책과 유튜브 영상이 있을 것이지만, 오늘은 이번 주제에 필요한 이야기만 뽑아서 얘기하고자 한다. 바로 화폐의 등장과 하이퍼 인플레이션, 금본위제이다.
고등학교 의무교육과정을 무난히 마쳤다면 한 번쯤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고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잉여생산물이 생긴다. 농부는 쌀이 남는데 어부는 물고기가 남으니 서로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쌀가마를 지고 오는 농부는 뭔가 손해보는 기분을 떨칠수가 없다. 매번 쌀을 들쳐메고 오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제 조개껍데기 10개를 쌀 한가마니라고 생각하자'는 놀라운 제안을 하는데 (처음 말 꺼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것이 바로 화폐의 시작이다.
모두 아는 이야기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화폐는 '가치를 약속한 것'이라는 점이다. 위 예시에서 조개껍데기 10개를 쌀 한가마니로 약속한 것이 그런 부분이다. 즉 화폐라는 재화는 모든 다른 거래가능한 재화와의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그 교환가치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살펴보자
화폐는 다른 재화와의 교환가치를 갖는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참 흥미로운 소재이다. 우리가 아는 일상의 생활 논리와 너무나도 달라서 거의 이세계 컨텐츠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엄연히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우리라고 겪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사진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물가가 미친듯이 빠른 속도로 올라서 돈의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는 현상이다. 하이퍼 인플레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국가의 무리한 화폐 추가 발행, 국가 화폐 신뢰도 하락, 실물경제 붕괴, 불안정한 재화의 수급 등등.. 어찌되었든 이러한 원인 때문에 1) 화폐의 공급이 엄청나게 늘어나거나 2) 자산의 수요가 엄청나게 높아질 때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다.
(다만 한국은행에서 13년에 발행한 물가보고서를 보면 금리 중심으로 통화정책을 운영하기 시작한 00년대 이후에는 통화량(M2)과 소비자물가가 연관관계가 약해졌다고 한다... 요즘 국가가 화폐를 맘대로 찍어내도 된다는 현대통화이론과 같은 이상한 얘기들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어짜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우니 하이퍼 인플레이션 같은게 있었다 정도만 하고 넘어가자)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중요한 시사점은 현금이 절대적인 안전자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퍼 수준이 아닌 일상적인 인플레이션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절대적인 안전자산도 아니거니와 가치는 계속 떨어진다면, 스위스 은행에 보관료를 주고 돈을 맡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닐까?
현금이 절대적인 안전자산은 아니다
화폐는 조개껍데기에서부터 금, 은, 각종 보석과 같이 희귀하거나 제련하기 어려운 광물이 주로 쓰였다. 심지어 선과 악이 싸우던 중세시대에는 특별한 힘을 가진 반지를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니, 돈은 지역별, 시대별로 실로 다양하게 분화되어왔다.
그 중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활용도를 보이는 것이 바로 금이었다.
처음에는 금을 동전으로 가공한 금화와 같이 금 자체를 화폐로서 유통했다. 하지만 역시나 무거웠는지 금을 현재의 은행과 같은 곳에 맡겨두고 '내가 금을 맡겨두었다는 증거가 적힌 종이'를 화폐로 활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금본위제의 기본적인 개념이다.(물리적인 제약은 종종 위대함을 낳는다) 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약속한 가치를 보증받기 위해 금이라는 재화를 기준으로 삼아서 유통시킨 것이다. 쌀 한가마니를 조개껍데기 10개로 약속한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금본위제를 기반으로 화폐정책을 운영했는데, 세계 2차대전 이후 전 세계가 전쟁의 상흔으로 더 이상 금본위제를 운영할 만큼 금이 충분히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 나라, 미국만 빼고. 그래서 전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화폐 정책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브레튼우즈 협정'이다. 협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 1온스 = 35달러
다른 나라 화폐의 가치는 각각 달러와 일정 비율로 연동
한마디로, 각 국가에서 운영하던 화폐의 금 교환 기능을 미국이 전부 담당할테니까 전 세계에서 달러를 써라... 라는 이야기이다. 다른 나라에서 그랬으면 정신나간 소리였겠지만 2차 세계 대전에서 자국 피해는 1도 없이 신나게 공장돌려 무기 팔아 승리를 거둔 미국이 그렇다면 그런거지. 이 합의를 시작으로 미국 달러가 전 세계의 기축통화로서 자리잡게 되고 세계적으로 금과 달러를 기준으로 환율이 고정되어있는 '고정환율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하지만 역사가 스포했듯이 역시나 고정환율제는 폐지되고 만다.
현물을 기준으로 하는 고정환율제는 작은 사회에서는 잘 통제되어 굴러갔을지 모르나 전 세계를 무대로 하니 그 맹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현물과 통화의 가치를 맞추는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에 금이 100 온스밖에 없다고 해보자. 그럼 브레튼우즈 협정에 따라 미국은 1 온스를 35 달러로 바꿔주어야 하므로 시장에는 3,500 달러만 풀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세계 경제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국제거래에 활용할 달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졌다. 모든것이 파괴되었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기회를 찾는 욕망과 전쟁의 상흔을 복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폭발하는 시기였다.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시장의 달러 수요 역시 폭증했다. 달러를 추가로 발행하면 그에 따라 금도 같이 확보가 되어야 하지만 어디 그게 맘대로 되는 일일까. 달러는 프린터로 찍어내면 되지만 금은 그렇지 않기에 가치가 있는걸... 일단 달러를 많이 찍기는 찍는데 시중에 풀린 달러가 많으니 달러의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오잉? 미국에 달러를 갔다주면 35 달러에 1 온스로 가격이 고정되어 있네?
시중에 달러가 많으니 달러를 좀 많이 들고있는 친구도 생겨나게 되고, 그 친구는 넘치는 달러를 금으로 또 바꿔버리고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세계의 경제규모가 성장함에 따라 전 세계에 이런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그 미국도 버티지 못하고 1971년 금태환 중지를 선언, 본격적으로 변동환율제가 실시되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의 가치가 모든 것에 대해 상대적인, 세상은 대환율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고정환율제는 실패하고 세계는 변동환율제로 돌아간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점은 무엇일까? '역시 금이 짱이다' 혹은 '예쁜 조개껍데기를 보면 줍자' 등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모든 자산의 가치는 변동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현금마저도.
경제가 성장하는 한 자산가치가 올라가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럼 상대적으로 현금의 가치는 떨어진다. 일시적으로 경제가 위축되어 디플레이션이 올 수도 있지만, 경제가 더욱 불안해지면 현금보다는 실질적인 사용가치를 갖는 자산이 더 유의미한 자산이 된다. 여러 국면에 따라 주목받는 자산의 종류는 천차만별이고 현금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특히 대한민국 원화는 아주아주아주 일부일 뿐이다)
이 글은 예적금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자산을 예,적금으로만 관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써 보았다. 소량의 현금을 고정이율로 축적하는 수단으로 적금은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 소득 중 몇 퍼센트를 안전이율을 받으며 모으려고 적금을 가입하는 것이 아닌, 모든 자산 관리 수단으로 삼는 것은 자신의 전재산을 인플레이션 위험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자산을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사실은 심지어 모두 예금, 적금으로 이루어진 포트폴리오여도 괜찮다. 다만 그것이 현금 보유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본인의 성향에 따라 다른 옵션을 검토한 이후에 이루어진 결정이어야 한다.
20년 3월 16일, 한국은행은 역대 최초로 0%대 기준금리를 발표했다. 사실 금리만 받아서는 물가상승률도 따라가지 못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이번에 쐐기를 박게 되었다. 돈을 더욱 현명하게 굴려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