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 영어. 스피킹 맥스. 정철영어. 해커스초보 탈출 영어. 인터넷을 잠깐만 훑어 보아도 영어관련 광고는 부지기수다. 기적의 암기법부터, 왕초보 영어탈출, 영어천재의 공부비법 등등. 영어 왕초보를 탈출하자는 광고가 갑자기 많아졌다. 야구선수 류현진부터 유재석을 앞세워서 네 단어짜리 문장을 읽게 하는 광고나, 입국 심사대에서 방문한 목적이 뭐냐는 질문에 폭포처럼 땀을 흘리는 우스꽝스러운 광고는 웃긴게 이만저만 아니다.
웃기지만 이런 광고를 보고 있으면 은근히 열받는다. 광고를 보고 기분이 나쁜 사람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초보 수준의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저렇게 바보처럼 묘사하는건 분명 정상적인 마인드에서 나온 광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영어교육이 정상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또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기분 나쁘게 해서 영어를 배우게 하겠다는 고차원적인 광고전략이 있는 걸까? 이 광고들은 영어를 어떻게 가르치겠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너는 영어를 진짜 못한다”, “너의 영어는 기본적인 수준도 안된다” “초보영어에서 탈출하려면 학원으로 와라” “영어못하면 무식하다”.. 는 것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지난 수 십 년간 한국의 교육기관과 학교에서 전 국가적으로 영어에 쏟아부은 시간과 열정과 돈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국민 대다수를 향해 너희는 아주 기본적인 영어도 못한다는 광고를 때리다니.
어이가 없다. 돈버는 것에 혈안이 된 영어 사교육 회사가 지난 수 십 년간의 한국 영어교육의 폐해를 대단히 직접적으로 증언해 주는 꼴이다. 그동안 얼마나 영어교육이 엉망으로 돌고 돌았으면, 이제 와서 다시 기본영어를 해야 된다고 떠드는 걸까.
사실 그동안의 모든 영어교육은 비즈니스 그 자체였다. 돈과 직결되는 것이니, 당연히 교육적인 측면, 기능적인 측면, 실용적인 측면의 영어는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여전히 돈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만 반복적으로 소비된다.
영어라는 언어를 잘 가르치는 것과 영어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다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사람들은 영어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영어를 잘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유튜브나 아프리카 티비같은 개인방송은 물론 일반 학원에서도 인강으로 유명한 강사들은 정말 많다. 흔히 시험영어 수능영어를 잘 가르친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가장 많은 수강생을 거느리는 스타강사들이다. 그럼, 정말 영어를 잘 가르치는가?
그렇다. 잘 가르친다. 하지만 거기서 가르치는 영어는 사교육 시장과 근본 없는 교육정책이 원나잇스탠드로 만들어낸 짜깁기 영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영어는 옥스퍼드에 재학중인 영국학생이 풀어도 반타작하는 그런 영어니까. 스타강사는 그런 영어를 잘 가르친다. 거기엔 나름대로의 스킬과 전문성도 있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사실 영어를 배운다기 보다는 영어점수를 올리는 방법을 배운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직접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할수 있는 능력보다, 점수만 따면 되고, 등급만 올리면 되고, 원하는 대학에 가기만 하면 된다. 영어는 대학에 가서 다시 공부하면 되고, 영어학원비나 등록금은 부모가 내줄 테니까.
토익이나 토플, 텝스를 광고하던 영어열풍은 예전과 같지 않다. 실제 토익이나 토플 같은 시험영어를 보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다. 당연히, 그로 인해 시험을 통한 수익은 많이 감소했을 것이고, 또 수능영어를 포함해서 중고등학교 영어 사교육 시장이 점점 줄어들고 있을 것이다. 과거 수험생이 100만명을 육박하던 시대에서 현재는 50만 정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수험생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서 곧 수험생의 수보다 대학입학정원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신문기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최근 수십년간 잘나가던 영어사교육 시장의 전체적인 규모는 반타작도 무색할 정도로 축소되었고, 그동안 수험생과 학부모의 피를 빨아먹던 사교육시장은 이제 난데없는 영어 왕초보탈출이라는 슬로건으로 거의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영어 왕초보의 상태를 탈출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광고를 보다 보면 정말 왕초보 영어탈출이라는 명제가 마치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광고가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세뇌효과 때문이다.
광고가 한창 발달하던 20세기 중반 잘나가는 식품회사들은 자기들의 제품이 맛있다고 광고하지 않았다. 대신 의사를 등장시키면서 하루 필요한 영양분이 얼마인데, 이 제품으로 어느 정도를 보충하고 어떤 질병을 예방하는데 효과가 있는지를 말하게 했다. 광고라기 보다 마치 교육 다큐인것처럼 지식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의 광고는 물건에 대한 정보를 알리기보다, 새로운 물건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전에는 몰랐던 지식체계를 구성하게 해주는 일종의 세뇌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클라이덴트 치약의 미백효과나 데톨의 살균 99퍼센트, 자연 그대로의 오렌지를 담았다는 오렌지 쥬스의 카피는 크게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광고의 힘.
초보영어에는 웃기는 역설이 있다. 누가 초보 영어를 필요로 하는가? 대기업 직원? 초보영어를 배워야 하는 사람은 대기업에서 뽑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 CEO? 대기업 CEO 라면 굳이 자신이 직접 영어를 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출중한 어학 능력이 되는 부하직원이 없다면 대기업CEO도 아니겠지. 중고등학생들에게 초보영어? 이미 어려서 영어유치원부터 다닌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초딩? 초등학생들이 직장 상사나 경찰관과 나누는 대화, 레스토랑 웨이터에게 주문하는 대화를 배워야 할까? 그럼 자녀들 학업 뒷바라지 하는 전업 아줌마들? 그런 아줌마들이 왜 초보영어가 필요할까? 자식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영어를 못한다고 부모를 무시하는 자식들이라면 영어가 아니어도 부모를 무시할 자식들이다. 그럼, 이 초보영어는 왜 이렇게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떠들어 댈까?
정말 그런 영어가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