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자”
어느 교실의 급훈이거나, 혹은 어떤 가게의 영업모토이거나, 혹은 어느 집안의 가훈이기도 할 이 말은 가끔 끔찍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그 순수한 의미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늘” 최선을 강권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는 절대 “최선”은 아닌 것 같다. 분명, 나에게도 그 “최선”을 목표로 매 순간 주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최선”의 결과를 위해 매진하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그 “최선”이라는 말은 내 삶을 같은 자리에서 계속 맴돌게 만드는 기만적인 쇠사슬처럼 느껴지고, 이젠 그 육중한 무게를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 번아웃 증후군은 이렇게 뭔가에 대해서 극도의 최선을 다했을때 찾아오는 말 아니던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어떤 형태의 불만족스러운 결과에 대해 더 이상의 비난이나 힐책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경기의 결과가 형편없어도, 성적이 안 좋아도, 남녀간의 관계가 깨져도 최선을 다하고 난 이후의 결과라면, 그것은 사실상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선이라는 말은 일종의 한계지점인 셈이고, 최선을 넘어선다는 것은 결국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당연히 인간적인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더 이상의 문제제기의 여지를 지워버린다. 그런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기만적인 의도나 불성실한 의도에서 남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학교와 사회에서는 매순간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고, 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결점 삶의 덕목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진실한 고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추궁이 어렵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불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정한 어떤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를 시험하면서까지 정신과 육신을 혹독하고 가혹한 삶의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라면, 그 삶의 목표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수험생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잠을 줄이고, 친구를 최소로 만나고, 가족의 대소사를 챙기지 않으며, 오로지 시험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도대체 잠도 못자고, 친구도 만나지 않고 가족의 생일도 챙기지 않는 그 삶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까? 수험생의 신분은 잠깐이니, 길고 긴 인생을 생각하면 그 기간은 짧으니까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최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대학에 들어가면 또 성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승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제시되는 데도 말이다. 그럼, 그때 마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삶의 궤도 바깥으로 내팽겨쳐진 것들은 언제 다시 자신의 삶으로 거두어 올수 있는가?
늘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의 속도로는 절대 그것들에게 손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최선과 시간의 관계는 마치 시간이라는 낙타를 집어삼키는 최선이라는 사구와 같다. 최선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더 부족하다. 심지어 많이 투자하면 더 많이 부족하게 느껴지는게 최선의 환상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가장 거대한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절대 최선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니까.
최선은 늘 속도를 추구한다. 속도는 바로 생산성과 직결되고, 이러한 생산성이 삶의 성취와 패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긴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도 길다. 이것은 가벼운 말장난처럼 들린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은 사실상 삶의 전 구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인생의 궤도가 안정될수록 더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다. 속도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기술은 현대로 오면서 급격한 기술적 진보를 이루어냈고, 이젠 사실상 사람들의 삶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다고 해야 한다.
이메일, 스마트폰, 인터넷, 티비.
편지를 보내면 보름이 걸리던 시절은 벌써 먼 과거의 일처럼만 느껴진다. 보낸지 5분도 안된 편지에 답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답장이 오지 않으면 상대방이 읽어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이메일 시스템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오가는 편지다.
금융경제에서 시간은 돈으로 직결된다. “시간은 돈”이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후계자들은 저마다 프랭클린 다이어리로 자신의 하루를 쪼개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으려 한다. 시간낭비는 종종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1초, 아니 0.1초라는 순간의 차이로도 수천억원의 이익과 손실이 결정된다. 점점 경제적인 가치가 전지전능해져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속도가 만들어내는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리 없다.
결국 그 시스템에 접속해 있는 대다수의 개인에게도 똑같은 속도를 강요하고, 많은 사람들은 결국 자기 삶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 늘 맥시멈 스피드로 달려야 한다는 외부의 강요는 늘 “최선”이라는 양의 가면을 쓰고 온다. 이런 맥락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은 너무 가혹하고 비인간적이다.
기술의 발달로 훨씬 더 빨라진 삶의 속도는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에 올라탄 것과 같다. 속도는 삶의 자율성을 빼앗아간다. 달리 말한다면, 당신이 바쁘게 살면 살수록, 당신은 사실 자신의 삶을 사는 게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기관차에서 내리는 것도 쉽지는 않다. 모두가 다 빛의 속도로 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 비포장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은 쉽게 시도하기 어려운 모험이다.
학계에서도 천천히 조금씩 틔워가는 학문의 성찰을 성큼 반기지는 않는다. 학문의 평가 역시 속도와 효율성 생산성이라는 경제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자본주의 생산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료학자들과 경쟁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써야한다는 속도와 생산에 대한 부담은 늘 “최선을 다한다”는 말로 포장되어 단 한마디의 불평도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논문을 쓰느라 바빠서 학생들과 토론하지 못하고, 동료와 의견을 주고받지 못하며,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의 책을 읽지 못하고 매일 매일의 저녁시간을 일에 저당잡혀야 하는 그 삶의 속도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매일 아침 출근전쟁을 치르고, 분기별로 실적을 평가받고, 학기별로 논문의 편수를 세어야 하고, 주말마다 여기저기 행사에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며 인맥을 넓혀야 하는 이 소모적인 삶의 속도를 정말 줄일 수는 없을까?
재능있는 천재들의 업적은 결과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재앙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놀라운 속도로 이룩한 어마어마한 성취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기준선이 된 것처럼 세상은 온통 그런 성공한 천재와 비범한 재능으로 이룩한 업적을 찬양한다. 그런 인물들의 화려하면서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늘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천재들이 이룬 삶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그런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비현실적일 만큼 가혹하다. 모차르트가 남긴 천재적인 음악성 앞에서 자신을 평범함의 챔피언이라고 자조하며, 천재성의 부재를 탄식하고 통곡했던 살리에르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아름다운 나비의 날갯짓은 80퍼센트 이상이 비효율적인 것이라던 어느 생물학자의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