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로서의 영어, 문화로서의 영어
1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국학생들은 영어권 문화에 대해서 과연 얼만큼의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과연 그 문화적 이해와 지식을 공급하는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영어교육은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영어는 과목이고 시험이고 성적이고 점수이기 이전에, 문화이고 소통이며 수단이고 생활이다. 시험과 성적을 위해 영어를 "공부"만 해서는 절대 문화와 생활로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만큼 언어실력이 향상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영어를 공부만 해서는 절대 높은 수준의 영어로 발돋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기업에서 이렇게 심하게 강조하는 영어. 당연히 고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영어실력도 좋을 것 같지만, 몇 년전 FTA 조약과 관련해서 불거져 나온 번역의 문제를 생각해보라. 과연 영어에 쏟아붓는 예산이 10조를 웃도는 한 국가의 외교통상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기본적인 사항에서 조차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오역이 난무한다는 것은 극적으로 드러난 한국 영어교육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이런 문제의 가장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 영어를 공부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는 공부과목 이기 이전에 언어이고 문화이다. 최소한 문화적 차원에서의 영어에 대한 고민이 학습과 병행할때, 한국의 영어교실은 좀더 즐겁게 재미있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어가 하나의 문화체계를 구성하는 근간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생활 속에 한 일부분으로 자리 매김하는 것이 될 때, 영어는 더 이상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한국의 현실을 가장 기만적으로 이용하는 곳은 바로 학원이다(물론 학교도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원들은 영어의 문화적 측면 보다, 시험으로서의 영어, 목적으로서의 영어, 기술로서의 영어에 주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곳에서 영어는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포장되며 영어를 통한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 확보가 마치 시대의 요구사항이 된 것 같은 메시지를 형형색색의 활자로 전달한다. 학생들은 그 글로벌한 경쟁력의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을 갖게 되고, 결국 많은 학생들은 이른 새벽 시간부터 토익 고급반을 찾거나 영어면접을 위한 회화학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구호는 낯설지 않다.
하지만 과연 영어는 글로벌한 경쟁력의 바탕이 될 수 있을까?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영어는 실제로 효과적인 경쟁력의 수단이 되기도 했었다. 한국에서 90년대에 벌어진 영어공용화론은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일본에서 바바 다쓰이와 모리 아리노리 사이에서 논쟁이 되기도 했던 이슈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영어, 혹은 다른 외국어에 대한 집중적인 교육보다, 번역에 더 많은 사회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번역국을 설치하여 당시까지 연구된 서구 지식의 상당부분을 일본어로 바꾸는 작업을 메이지 유신시대부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영어를 비롯 외국어로 쓰여진 서구의 기초학문분야 대부분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덕분에 영어를 못하는 평범한 일본인들도 서구의 기초학문을 일본어로 공부할 수 있었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했던 다나카 고이치는 노벨상 수상소감에서 자신은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전문적인 학자의 라벨과 같은 박사학위 같은 것도 없었다. 영어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국과 다르다, 영어에 목을 매는 직장도 학생들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과연 영어는 글로벌한 경쟁력의 바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은 지나치게 경쟁력이라는 구도에 매몰되어 있고, 동시에 영어에 대한 위험할 정도의 맹신이 만연해 있다. 내가 만났던 훈민정음을 연구하신 어느 교수님은 중세국어 연구분야에서 매우 실력 있는 분이셨다. 하지만 그분은 여러번 교수임용심사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는데, 그 이유는 최종면접이 영어면접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을 연구한 학자에게도 영어면접을 요구하는 것은 얼핏 생각해도 코미디같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고 보면 대학조차도 그러한 맹신의 추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교양영어라는 명목하에 교양은 사라지고 기능적인 영어표현만을 기계적으로 가르치는 수업을 개설한다. 학생들의 취업률을 높이려면 토익성적을 높여야 하고, 토익 성적을 높이려면 “교양”에 비중을 두기보다, “영어” 그것도 “시험영어”에 비중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당국조차 정책적으로 점수중심의, 성적중심의 교육을 향해 올인하는데, 학생들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나, 진정한 의사소통으로서의 영어, 문화적 체험으로서의 언어적 경험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생들에겐 문화적 이해나 진정한 소통의 경험보다 당장 토익 50점 100점이 더 중요한 것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한 번 더 일어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당장 눈앞의 성적을 올려려고 공부한 학생들은 결국, 그 정도의 시험영어 수준에서 실력이 고정될 가능성이 높다. 좋게 말해 고정이지, 결국 시험을 준비하는 것만큼 계속 관심을 갖지 않으면 실력이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문화적 측면을 중시하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영어를 중시한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영어에 대한 문화적 관심이 당장 토익 점수에 반영되지는 않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가치에 반영될 수 있다. 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 영어를 익히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국어로만 되어 있는 많은 문화적 환경들이, 조금씩 영어친화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려고 할 것이고, 외국인을 만나도 위축되지 않고, 네이버나 다음에서 베끼듯이 옮겨오는 외신들을 직접 CNN 이나 BBC 혹은 가디언에 접속해서 뉴스를 읽어보게 될 것이다. 가끔씩 교보에서 흥미있는 영어권 현대소설들을 골라서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페이스북에는 조금씩 외국인 친구들이 생길 것이고, 아마존이나 이베이를 통해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에도 조금씩 자신이 생길 것이다. 테드를 챙겨 보면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비젼을 넒힐 수도 있고, PBS나 National Geographic 을 살펴 보면서 교양과 상식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트렌드로 라면 NPR을 즐겨 보게 될수도 있다.
자, 그럼, 결과는?
실력이라는 계량적인 기준으로도 그렇겠지만, 실력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영어를 의사소통과 문화의 요소로 접근한 학생들의 영어가 훨씬 더 풍부하고 의미있는 영어가 될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난 반대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영어의 경쟁력은 실질적인 영어구사능력 보다, 영어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하는 컨텐츠가 어떤 것이냐에 달려 있다. 마이클이라는 외국인 친구가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대화를 할 것인가? 맥주 한 두잔 마시면서, 한국엔 언제 왔느냐, 한국 음식중 뭐가 좋으냐, 취미가 뭐고, 주말엔 뭐 할거냐고만 물어볼 것인가? 한국인들끼리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저 그런, 겉돌기만 하는 관계를 유지하는데 어떤 거창한 깊고 진지한 대화가 필요한가? 관계가 진지해지고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첫째가 교양과 상식 그리고 문화적 이해와 배려이며 둘째가 영어여야 한다.
한국의 글로벌한 경쟁력은 사실, 겉으로 주장하는 것만큼 글로벌하지 않아 보인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의 수가 2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만큼 다양한 외국인이 혼재하지만, 정작 우리들의 일상 속에 외국인들과의 문화적 교류의 기회는 십 년 전이나 이십 년 전이나 어렵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어를 생활 속에서 사용하며 익히기에 아직도 서울의 많은 거리는 20년 전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것이다. 이미 외국의 문화적 경험을 했던 사람들만이 서울에서도 외국인들과의 소통의 기회를 갖고, 그러한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은 결국 외국인이 주변에 있다 해도 별 소통의 기회를 가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영어를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부만 한다면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