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듣고 까먹는 이유?

ADHD와 청각 정보 처리의 뇌과학

by 채성준


ADHD와 '청각적 정보 처리'


<상황 1>

"A, B 순서대로 처리하고, C에게 전달해 주세요."


분명히 상사의 말을 듣고 "네!"라고 대답했는데, 돌아서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A 다음에 C였나? B는 뭐였지?"



<상황 2>

"오는 길에 마트 가서 우유랑 빵 좀 사고, 주유소 들러서 기름도 넣어와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집에 도착하니 손에는 우유 하나만 들려있습니다.

주유소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ADHD 성향을 가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순간입니다.


이는 절대 당신이 무례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무시해서, 혹은 성의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 현상의 핵심에는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특히 '청각 정보(Auditory Information)'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말로 들으면 잊어버릴까? : '단어'만 듣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뇌


왜 유독 '말로 듣는' 지시사항에 취약할까요?


책 <ADHD 농경사회의 사냥꾼>은 이에 대해 매우 명쾌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핵심은 ADHD가 '청각 정보 또는 언어 정보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심부름'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가게에 가서 우유 한 병, 빵 한 덩이, 오렌지 주스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차에 주유해"라는 지시를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신경전형인(Neurotypical)의 뇌 (ADHD가 아님)


이 말을 들으면서 뇌 속에서는 '가게 선반', '우유팩', '식빵', '주스 병', '주유소'의 시각적 이미지를 자동으로 그려냅니다. 이 '언어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결합하면서 강력하고 효율적인 기억이 생성됩니다.



ADHD 성향의 뇌


기억에 필수적인 이 '머릿속 그림(Mental Picture)'을 그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단어' 그 자체만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유, 빵, 주스, 주유..."를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되뇌며(음운 루프) 가게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 기억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운전 중 다른 차가 끼어들거나, 라디오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다른 자극이 들어오는 순간,


이 약한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맙니다.



"내가 지금 어딜 가고 있었지?"라며 목적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시각 정보에 특화된 ADHD는 청각 정보는 처리가 느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청각 정보'를 '시각 정보'로 자동 변환하는 번역기가 잘 작동하지 않는 셈입니다.




'작업 기억(Working Memory)'과 청각 정보의 치명적 관계


이 '머릿속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ADHD 코칭의 핵심 개념인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s)',


그중에서도 '작업 기억(Working Memory)'과 직결됩니다.



'작업 기억'은 뇌의 '임시 메모장' 또는 '화이트보드'입니다.


우리가 정보를 잠시 붙들고 생각하고, 처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기는 모든 과정을 담당합니다.


흔히 ADHD는 이 '화이트보드'의 크기가 작거나, 혹은 정보가 너무 빨리 지워지는 특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유", "빵", "주스", "주유"라는 4개의 '단어' 정보는 이 작은 화이트보드에 각각 4칸을 차지합니다.


매우 비효율적이며, 외부 자극이 조금만 들어와도 1~2개는 금방 밀려나고 지워집니다.



하지만 "내가 카트에 우유와 빵과 주스를 담고, 주유소에 있는 그림"은


단 '하나의 장면(Chunk)'으로 화이트보드에 저장됩니다.



훨씬 적은 용량을 차지하고, 훨씬 더 강력하게 기억됩니다.



즉, ADHD가 지시사항을 잊는 것은


'청각 정보'를 효율적인 '시각 정보 덩어리(Chunk)'로 변환하여 작업 기억에 저장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없어서", "독립적이어서"가 아닌 '처리 방식'의 문제



책 <ADHD 농경사회의 사냥꾼>은 지시를 따르기 어려운 이유에 대한 다른 이론들도 언급합니다.



1. 처음부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물론 이것도 ADHD의 '주의력 조절' 문제와 관련이 큽니다.)


2. ADHD가 매우 독립적이라 지시받는 것을 싫어해서 (이 역시 '반항성'이 아닌 '자율성' 추구라는 특성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성향이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의 많은 권위자는 이러한 태도의 문제보다,


'청각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방식 차이'를 가장 유력한 근본 원인으로 봅니다.



이는 "왜 나만 이럴까" 자책하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이것은 '태도'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정보 처리 매뉴얼'이 다른 것뿐입니다.




해결법: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볼래?"


청각 정보를 시각 정보로 변환하는 이 기술은, 우리가 평생 갖지 못하는 '결함'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합니다.


지금이라도 기술을 '의식적으로' 배우고 연습하면 됩니다.



1. '수동 번역'을 위한 멈춤

누군가 말로 지시를 내릴 때, "네!"라고 바로 대답하기 전에 1초만 멈추세요.


"잠시만요, 정리 좀 할게요."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2. '감독'이 되어 장면 만들기

상대방의 '단어'를 외우려 하지 말고, 그 말을 '장면'으로 만드세요.


(예: 팀장님이 나에게 파란색 A 서류를 주고, 내가 그걸 B 폴더에 넣고, C에게 메일을 보내는 '한 컷의 만화'나 '짧은 영상'을 머릿속에 그립니다.)


책에서는 아이에게 "그걸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볼래?"라고 말했을 때, 아이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해 움직이는 특징적인 행동이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정신적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3. '시각적 정보'로 즉시 변환하기 (메모)

머릿속 그림만으로 부족하다면, 가장 확실한 '시각 정보'인 '글'로 바꾸세요. 지시사항을 듣는 즉시 키워드만이라도 적으세요. '우유, 빵, 주유'라고 적는 행위 자체가 청각 정보를 시각 정보로 변환하는 강력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듣는 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상영관'을 켜는 스위치가 자동이 아닌 '수동'일 뿐입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의식적으로 그 스위치를 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오늘부터 누군가의 지시를 '단어'로 기억하지 말고, '한 컷의 그림'으로 변환해보세요."





채성준 ADHD 코치




<참고자료>




ADHD 농경사회의 사냥꾼



톰 하트만2024또다른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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