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김밥의 유래
근래에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매주 한 번은 꼭 해 먹은 음식이 있다. 바로 김밥. 사십 대 남편, 십 대 큰 딸, 미취학아동인 둘째 딸까지 네 식구 모두 좋아하는 메뉴다. 먹성 좋은 가족이라 기본 열 줄은 싸야 한다. 한두 줄만 먹을 거면 사다 먹는 게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도 이득이다. 하지만 온 가족 든든히 먹으려면 몇 만 원을 써야 하는데 김밥이라는 단품, 한 끼 비용으로는 못마땅하다. 손이 빠르지 못한 내가 한 시간 반 정도 수고로우면 우리 가족을 위한 집 김밥이 완성된다.
김밥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우리 엄마 정란 씨가 생각난다. 정란 씨는 스물다섯에 결혼을 해 맏며느리로서 시조모, 시부모, 시동생들까지 대식구의 살림을 꾸렸다. 학교 운동회라도 있는 날 아침에는 한 시간 안에 김밥 스무 줄을 거뜬히 쌌다. 엄마와 비교하면 손이 작았던 할머니는 다량의 김밥을 싸는 엄마를 보며 너는 김밥 장사를 하려는 거냐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엄마께 전해들은 일화였다. 할머니가 백 퍼센티지 악의로 말한 건 아니었겠지만 이 말을 들었던 엄마가 상처받았을 것 같다. 그 상황에서도 자식들을 위해 꿋꿋하게 김밥을 쌌을 엄마의 모습을 그려본다. 엄마는 김밥을 싸서 식구들만 챙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담 없이 지내는 앞집 할머니께도 꼭 맛을 보였다. 음식은 나누는 맛도 크다.
엄마가 김밥을 싸고 있으면 옆에 앉아 도시락 안에 넣지 않는 김밥 꽁다리를 오물오물 아침밥으로 먹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야문 질감의 단무지와 오이가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씹으면 이가 아프지 않을까 신경이 쓰인다. 곧 밥알, 침과 섞이며 스르르 녹아 단맛이 느껴지는데 그 사이로 짠맛이 치고 올라온다.
엄마 김밥을 신나게 먹던 그 어린 아이가 훌쩍 자라서 첫째를 임신했다. 어느 밤이었다. 저녁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집에서 만든 김밥을 엄청나게 먹고 싶었다. 급하게 장을 보고 김밥 재료를 손질했다. 초보 주부인 데다 스스로 처음 도전해 본 김밥이었다. 의욕만 앞서서 정란 씨의 김밥을 흉내 내며 내가 먹고 싶은 재료까지 첨가했다. 아마 여덟 가지는 됐을 것이다. 그랬더니 김밥 속 재료가 너무 많아 말리지 않았다. 김밥 김이 사정없이 터졌다. 말다가 터지기라도 하면 차라리 다행일 지경이었다. 자를 수 없는 김밥을 통으로 들고 베물어 먹었다.
이제는 김밥 열 줄을 만들어 전리품처럼 내놓으며 남편과 지난날의 흑역사에 관해 얘기한다. 처음에는 창피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그때의 나는 패기만 가득했던 김밥 초짜였구나 싶다. 하지만 김밥 실패기가 있었기에 현재의 김밥 성공기도 있을 수 있는 거라 여기며 남편보다 먼저 웃어넘긴다.
출산 전 마지막으로 힘을 내기 위해 먹었던 음식 역시 김밥이었다. 출산 준비물 챙기는 것도 버거워서 분식집에서 사 먹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김밥이 함께했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집에 온 손님에게 자주 대접한 음식도 역시나 김밥이었다. 하나같이 수진 씨 김밥이 최고라고 해준다. 정성이 많이 들어갔고 함께 먹는 이들과 정다우니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집 김밥에는 식당에서는 흉내 내기 어려운 내공이 숨겨져 있다. 정란 씨가 직접 농사지어 보내준 쌀과 참기름이 비장의 카드다. (몇 년 전 1박 2일 티브이 프로그램에 우리 아빠께서 참깨·들깨작목반 반장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고슬고슬하게 밥을 지어 참기름을 두르고 소금을 뿌려 김밥 밥을 만든다. 이대로 먹어도 한 그릇은 뚝딱일 테다.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맛이 우리 집 김밥에 들어있다.
십 년 동안 시중에 나와 있는 김밥 재료는 거의 다 써봤다. 이제는 그중에서 내 입맛에 맞는 재료만을 선택한다. 김밥 김은 시장에서 뭉치로 파는 게 질과 가격 측면에서 합격이었다. 또 김밥에 들어갈 속 재료를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역시 '밥'이다. 밥이 너무 꼬들꼬들하게 되면 김과 달라붙지 않아서 낭패다. 즉석밥 정도의 되직함이 알맞다. 건강을 생각한다고 잡곡을 넣는 것도 추천하지 않는다. 김밥 밥에서 겉도는 느낌이니 되도록 넣지 않는 것이 좋다. 여타의 재료 중 맛살은 정란 씨가 꼭 넣는 편이라 따라 넣다가 특유의 강하고 인공적인 단맛이 싫어서 뺐다. 달걀은 김밥 열 줄 기준 네 개를 사용하고 설탕을 한 꼬집 넣어서 지단을 부친다. 달큼한 냄새가 온 집안으로 퍼진다.
명분은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지만 실상 이유식을 만들고 남은 케일의 소진 목적으로 김밥에 케일을 넣었다. 코피를 자주 쏟는 두 아이를 위해 지혈에 효과가 있는 우엉을 넣어 보기도 했다. 보기 좋은 김밥이 맛있기도 하니 빨간 햄, 노란 단무지와 달걀, 초록 오이는 꼭 넣는 편이다. 냉장고 사정에 따라 파프리카가 추가되거나 오이가 시금치로 바뀌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엄마의 김밥으로 응원과 위로받았다. 지금은 지난 말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소울 푸드'는 단연 김밥이다. 엄마가 김밥을 매우 좋아하는 걸 알아서인지 두 딸내미도 "오늘은 어떤 음식을 해 줬으면 좋겠어?" 물으면 "김밥!"이라고 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남자 친구가 많은 유치원을 다니는 둘째가, 힘을 내고 싶을 때 특히 엄마표 김밥을 찾는다. 오늘은 우리 둘째를 위해서 좋아하는 달걀을 듬뿍 넣어 김밥을 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