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남자, 자살을 참고 암을 피했더니 화병이 오더라 III
최근 20대~30대 남성 화병 환자가 많아지고 있다. 특이하게도 20대~30대의 화병은 분노를 표출하는 양상이 크다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급성 화병', '격분 증후 화병'이라고 하고 양의학에서는 '간헐적 폭발 장애(분노 조절 장애)'라고 부른다. 화를 꾹꾹 눌러두다가 결국 마음과 몸이 모두 망가지는 지금까지의 화병과는 양상이 확실히 다르다. 전문가들은 20대~30대가 불공정한 사회구조의 심화로 인해 느낀 좌절감과 '인내가 미덕'이라는 관념이 해체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려 분노를 표출하는 화병의 양상을 보인다고 진단한다. 20대~30대라고 해서 일상의 분노가 없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공정한 사회구조라는 강한 분노의 원인이 쌓여있던 분노들을 터뜨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40대 남성 화병 환자는 '전통적인 화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일터에서는 '을'의 처지를 강요당해서 화가 난다. 집에서는 강력한 애착관계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때 생기는 마음의 상처가 분노를 만든다. 분노를 유발하는 사회의 문제들은 모든 이들의 정신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생긴 화들을 풀 곳은 마땅치 않은 처지다. 이는 사회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화병의 양상도 비슷해야겠지만 40대 남성 화병 환자는 꾸준히 늘어만 갈 뿐 병을 앓는 양상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40대 남자들이 처한 상황이 20대~30대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좌절감을 넘어선 무력감
20대~30대는 삶의 틀을 잡아가는 중이다. 그들은 각자가 원하는 형태의 삶의 틀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도전한다. 그런데 그러한 도전들 속에서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절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는 학자금 대출에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면서 겨우 졸업했는데 다른 누구는 부모의 든든한 재력으로 마음 편히 스펙을 쌓고 별다른 고생 없이 교문을 나선다. 사회에 나와 보면 그런 차이들이 고스란히 실력과 능력의 차이가 된다. 노력으로 그 차이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이미 출발선부터 달랐던 터라 여간해서 따라잡기가 어렵다. 결국 사회에 첫발을 디딜 때 만들어진 차이는 '계층'이라는 말로 완곡하게 표현되는 '계급'의 벽을 만든다. 아직은 젊다는 희망과 패기로 그 벽을 깨보려 하지만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사회구조는 성공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실패를 겪다 보면 세상은 바라는만큼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을 통제할 수도 없는 상황은 좌절감으로 다가온다. 그 좌절감은 공정하지 않은 부당한 대우 때문에 생겼기 때문에 분노를 낳는다. 그리고 그 분노는 나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 대상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좌절-공격성 가설(Frustration-Aggression Hypothesis)로 설명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간의 공격성은 좌절에서 기인하며 좌절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거나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경우 공격성을 갖는다. 특히 좌절의 원인이 부당하다고 느낄수록 공격성은 더 커지게 된다.
이런 경험은 젊은 세대들만이 겪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40대 남자들도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팍팍하게 살지 않았느냐는 얘기들을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40대가 사회에 발을 내딛던 시절은 지금처럼 소득 양극화 현상이 심하지도 않았고 계급과 계층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경향이 크지도 않았다. 지금보다는 운동장이 평평한 편이었다. 다만, 지금의 40대들은 운동장이 기울기 시작한 그때 출발선에 서 있었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던 때가 1997년 외환위기 전후다. 큰 혼란은 모두를 평등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그때의 혼란은 오히려 소득의 양극화를 불러왔다. 그전까지 엇비슷했던 출발선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그때가 지금 40대 중후반의 사회 진출 시기였다.
40대들이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경험하며 살아온 시간도 20대~30대의 그것보다 길다. 지금 40대들도 온갖 반칙과 부정을 직접,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능력이나 실력과는 관계 없이 아부와 아양으로 자리를 꿰차는 사람들도 무수히 봐왔고 그것을 즐기고 용인하는 조직 구조도 경험했다. 더 많은 유착과 더 큰 비리가 승리하는 것도 보았고 그것을 방관하고 침묵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때로는 반칙과 부정으로 인한 패배에 좌절감을 느낀 당사자가 되기도 했으며 위계질서와 권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존감이 무너지는 순간들을 참아내 왔다. 살아온 시간은 경험으로 쌓이는 만큼, 가슴속을 채운 분노도 당연히 20대~30대 보다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분노를 껴안은 채 살아온 40대 남자들이지만 20대~30대 남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쉽게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40대 남자들이 불공정한 사회 체계에 순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순응'은 익숙해짐, 적응을 뜻한다. 익숙해짐은 자주 보거나 겪어서 잘 아는 상태를 말하고 적응은 조건이나 환경에 알맞게 됨을 말한다. 40대 남자들이 불공정한 사회구조에 익숙해지고 적응했다는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는다. 부조리에 눈을 감아버리기도 하고 불공정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응의 뒤에는 40대 남자들의 또 다른 모습이 숨어있다. 무력감이다.
40대 남자들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부당한 대우, 공정하지 않은 결과, 자존감의 상실로 인해 좌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좌절감으로 인해 분노한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를 표출한다고 해서 좌절감을 준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숱하게 경험으로 알고 있다. 특히 그 분노가 오롯이 자기 혼자만의 것일 때, 위계질서의 아래에 위치한 사람의 것일 때 얼마나 무력한 지를 알고 있다. 그 무력감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체제에 순응하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다. 좌절로 인한 분노는 때로는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력감은 에너지로 쓸 수 없다. 무력감은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든다. 40대는 좌절감 대신 무력감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그들의 분노는 에너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약하다.
눈치 보는 샌드위치 세대
40대 남자들의 화병 양상에는 세대의 특성도 관련이 있다. 지금의 40대 남자들은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첫 세대나 다름없다. 그들은 선배 세대들처럼 권위주의적이거나 가부장적인 행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바뀌면서 권위주의적이거나 가부장적인 태도는 시대착오라는 취급을 받고 있다. 지금의 60대~70대들이 40대였던 시절 그들은 상사로서, 선배로서, 가장으로서 권위를 누려왔다. 정신 들게 한다면서 부하직원에게 인식 공격에 가까운 막말을 쏟아내고, 기강을 잡는다는 이유로 후배들을 줄 세워 놓고 사발주를 마시게 하고, 집에서는 아내와 자녀 앞에서 왕처럼 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그런 식으로 권위를 인정받겠다고 하면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나마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남아있는 조직에서는 어느 정도 권위주의가 통했다. 위계질서 안에서의 권위는 표면상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그 권위의 행사 역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었다. 직장에서 중간 관리자급이 많은 40대 남자들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목소리를 높일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권위가 정당하다는 이유로 모든 권위 행사 방식이 정당하다는 사고방식은 벌써부터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 요즘은 아무리 권위가 정당하다고 해도 그 권위의 행사 방식이 정도를 넘어서면 비난과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분위기다. 이제는 옛날처럼 여직원에게 함부로 언행을 일삼다가는 미투(Me Too)의 가해자가 되고 업무 지시와 훈계를 이유로 부하직원에게 막말을 하다가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어긴 사람이 된다.
40대 남자들이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사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것에서 벗어나야 옳다는 사회의식 변화의 첫 파도에 올라탄 세대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중년 남성들이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체제를 실컷 향유하고 나서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버리도록 종용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40대 남자들의 대부분은 그럴싸한 권위를 갖기도 전에 사회 인식의 변화를 맞이했고 가부장적인 가장보다는 경제적 부양자의 역할에 더 몰입해야 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40대 남자들로 하여금 분노를 함부로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40대는 50대~70대 보다 화병을 더 많이 앓게 되었다. 2017년 남성 화병 환자 통계를 보면 50대~70대 남성 화병 환자는 눈에 띄게 줄어든 반면 40대 남성 화병 환자는 5.9%가 증가했다. 아마도 40대 남자들이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의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면 화병이 늘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40대 남자들의 겪는 노화의 경험이 더해지면서 화병이 가중된다. 40대 중반 정도 되면 슬슬 늙어감이 드러난다. 눈가에는 주름이 생기고, 배가 나오고, 가슴살은 처진다. 눈은 침침해져서 피사체와의 거리를 확보해야 하고, 머리숱은 적어지고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다. 늙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젊은 나이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젊은 세대들에게 세상의 중심을 내줄 때가 곧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자신의 노화를 확인하면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상실감과 무력감은 때로 분노를 낳기도 한다.
40대 남자들의 줄어드는 공감 관계도 화병에 한몫을 한다. 40대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다. 그래서 소통이나 공감의 수준도 어중간하다. 젊은 사람들과의 소통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배 세대들과 공감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일터에서도 아주 친한 몇몇 동료를 제외하면 기계적으로 친근함을 표시하는 정도의 관계가 대부분이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공감의 밀도는 줄어든다. 아내와의 관계는 확실히 예전 같지 않다. 서로가 생활로 피곤한 탓에 접점이 줄어들고 연애 시절처럼 서로를 공감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익숙해진 대로 '그러려니' 하고 지레짐작하는 사이가 된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처럼 친밀하지는 못하다. 부쩍 커버린 아이들은 자기들의 관심 분야에 열중이고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는 곁을 잘 내주려 하지도 않는다.
공감을 바라는 것은 일종의 인정 욕구다. 그중에서도 친밀한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만큼 자존감을 고양시키는 것도 없다. 하지만 40대 남자들의 그런 욕구는 쉽게 채워지지는 않는다. 마흔이 넘은 남자 어른이 그런 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 욕구를 스스로 숨기는 일이 허다하다. 거꾸로, 그 나이에 무슨 인정을 받고 싶냐면서 인정 욕구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욕구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 사람은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그 좌절감은 공격성을 동반한 분노의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외에 40대 남자들이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남성상,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의식의 잔재들도 40대 남자들이 전통적인 양상으로 화병을 앓는 이유가 된다.
화병은 마음의 병이다. 마음의 병은 관계에서 오며 아픈 사람이 스스로 치유하는 일은 어렵고 드물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병은 사람과의 관계로 치료해야 한다. 분노를 숨기기에 급급해서 생긴 40대의 화병도 그렇게 치료해야 한다. 그냥 두면 만성이 되어 정신과 신체를 끊임없이 괴롭힐 테고 그 주변 사람마저 불행해진다. 아픈 사람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말을 해야 처방을 내릴 수 있듯이 화병도 속내를 털어놓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분노를 말하는 것은 분노를 반추하는 괴로운 과정이지만 그 확인 없이 치료를 시작할 수는 없다. 물론, 분노를 고백하고 그 분노를 누군가가 공감한다고 해서 분노가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분노는 그렇게 쉬운 감정이 아니다. 다만 공감과 지지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면 분노가 자존감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상쇄시킬 수 있다.
'40대 남자'는 근사한 벼슬이나 완장이 아니다. 과묵하게 들쳐 매고 살아야 하는 십자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이유들로 자신의 마음에 분노를 쌓아가는 것은 40년을 넘게 산 사람으로서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무턱대고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되겠지만 남자라서, 어른이라서, 남편이라서, 아버지라서, 선배라서 같은 타이틀에는 덜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자존감은 나쁜 감정을 참아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감정을 많이 쌓아야 고양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