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라는 우주, 생이라는 궤도
책장을 정리했다.
주제별로 정리했던 책들을, 표지 색상을 기준으로 다시 분류하고 보니 그 나름의 독특한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누군가 그러자고 정한 것도 아닐 텐데. 책 속에 담긴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려 애쓴 흔적일까.
책들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색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이야기들. 때로는 좀 슬프기도 한 진중하고 선명하게 전해야 할 이야기들을 담은 책들은 파란색. 감정을 덜어내고 사실에 가까운 내용만을 전하는 이야기들에는 흰색. 인간의 감정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울고, 웃고, 싸우며 사람 내 짙은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은 붉은색.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면면들을 담아보려 애쓴 이야기들은 이들을 닮은 나무 같은 갈색과 녹색.
그리고, 그런 여러 색상들의 향연 속에서 난 흰색과 푸르스름함 사이에 가장 오래 머무른다. 파랑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고, 흰색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리라.
그리고 얼마전 이 곳에 두 권의 책이 추가되었다. 서맨사하비의 ‘궤도’와 도날드 토마스 교수의 ‘루푸스 백과사전’. 두툼해서 베개로 써도 될 것 같은 루푸스 백과사전은 매일 뒤적이게 되니 책상 위에 그냥 두기로 결정하고, ‘궤도’를 푸른색 책들 사이에 끼워 넣으며 불과 몇 개월 전의 어느 아침을 떠올렸다.
“여보...나 목이 잘 안 돌아가.”
그날 아침, 그 한마디가 그전에 존재했지만 희미했던 궤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는 것을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분명, 처음엔 단순한 담이었다. 어쩌다 잠을 잘못 자면 걸리는, 한의원이나 정형외과에 가서 치료 몇 번 받으면 쉽게 낫고는 하던 그런 근육의 경직.
그러니 파스를 붙이고 찜질을 하면 낫겠지, 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목은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도 반쯤 굳은 목으로 뻗뻗하게 사진을 찍고, 함께한 친정 엄마도 이래서 어쩌냐며 연신 목을 마사지해주셨다. 하지만, 잠시 나아지는 듯싶던 증상은 개선을 해보려 간 요가 수업이 무색하게 통증이 심해갔다.
정형외과 의사는 x-ray 사진을 가리키며 나에게 설명했다.
“여기, 뒤통수에 작은 뼈 보이세요? 머리가 자꾸 앞으로 빠져서 승모근이 그걸 막느라 촉수처럼 발을 계속 내려서 그 부분이 작은 돌기처럼 뒤통수에 자라났어요. 한마디로 머리뼈가 자란 거죠.”
정말 그랬다.
뒤통수 한가운데 삐죽 올라선 작은 산.
머리부터 등, 어깨를 연결하는 승모근이 자꾸 제자리를 빠져나가 앞으로 향하는 거북목을 잡으려 애쓴 흔적이 자그마한 뼈로 남아 있었다. 오래된 나의 무심함이 세운 작은 기념비 같았다.
오래 앉아 있던 시간들, C가 아니라 뒤집어진 C라는 사진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외계인이 따로 없군.’
결국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치료에도 한계가 있어 시작된 정형외과의 주사치료는 정말 우주선 같은 기계 위에 나를 얹어두었고 ‘치료—통증 완화—일상 복귀—재발’의 작고 빠른 궤도에 진입시켰다.
다시 목을 젖혀 천장을 올려다볼 만큼 좋아진 어느 날. 나는 이제 더 이상 정형외과를 오가지 않아도 되겠다며 안도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목이 낫자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분명 마찬가지로 안 좋았을 텐데, 그간은 목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마치 진공관에 들어간 사람처럼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몸의 한 부위가 말없이 무너질 때, 다른 부위들 또한 연쇄적으로 기울어져 간다는 사실을 그날 진료실에서, 내 몸이 나보다 먼저 말을 배웠다는 걸 알았다.
근육은 열심히 움직여 키워나갈 때만 유지된다는 것을.
통증은 움직이지 못할 때 날카롭게 깊어진다는 것을.
약은 고통을 낮추는 대신 다른 기관의 음량을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존스홉킨스에서 펴낸 “루푸스 백과사전”에 따르면 루푸스를 진단을 받기까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6년까지 걸린다고 한다. 루푸스 자체가 다른 질병을 흉내 내는 증상을 많이 가지고 있고, 진단 역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다른 질병-를 다 제외한 뒤에야 판별이 가능하다 보니 이렇게 의학이 발전한 2025년에도 수년에 걸쳐서야 진단이 가능한 것.
그러니, 이 병은 오래전부터 내 주변을 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각기 다른 증상들로 드러난 건강상태는 내가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오래전부터 몸은 내게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배앓이로 시작된 잦은 내과 방문, 뜨거운 여름빛 아래 두 눈을 태우는 듯 따갑게 만들던 날들의 안과 진료, 피부가 가려워 잠 못 들던 날들. 피곤하면 부어오르던 임파선과 경직되어 잘 돌아가지 않던 근육과 관절들. 그렇게 부위에 따라 각기 다른 병원을 옮겨 다니다 보니 내 일정표와 지출목록에는 차곡차곡 병원들의 이름이 쌓여갔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들 대신 병원의 이름들이 박혀 있었다.
월요일은 정형외과를
화요일은 안과를
수요일은 피부과를
목요일은 또다시 정형외과를
금요일은 내과를.
통증으로 운동을 할 수 없어 실내에서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근육은 점점 약해지고 다른 문제들도 연달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루푸스 증상 중 하나인 전신 무력감과 끊임없이 나는 열로 소진되어 버리는 칼로리 때문에 아무리 음식을 잘 챙겨 먹어도 몸은 날이 갈수록 얇아졌다.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가족들의 걱정이 있었지만, 늘 입맛이 없어 애를 먹었는데 알고 보니 이 또한 루푸스의 관리제로 쓰이는 면역억제제의 부작용 중 하나라는 사실도 후에 알게 되었다. 약해진 체력은 계단을 조금만 올라도 헉헉거리게 되어 두어 주에 한번 가던 정형외과를 “선생님, 오늘은 여기가 아파요.”라며 진료실 문턱이 닳게 들어가는 날들이 늘어갔다.
루푸스라는 병의 주된 증상 때문에 살과 근육이 빠지고. 그걸 치료하느라 먹는 약은 밥맛을 떨구고. 또 그래서 체중은 더 빠지고, 그나마 있던 근육이 사라져 몸이 약해지니 루푸스 활성기가 오면 통증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의 궤도를 돌고 있다. 주말이면 희미해졌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서서히 선명해지는 증상들은 핸드폰 캘린더 속에서 점과 점을 이어 하나의 선을 만들고 있었는데, 나는 그 알람을 알지 못한 채 공전하고 있었다. 아픔을 없애기보다는, 버티는 법을 더 먼저 버린 결과로. 내가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나의 궤도는 달라졌을까?
서맨사 하비의 책‘궤도’에는, 지구 주위를 하루에 16번 도는 우주비행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궤도 위를 돌며 매일 비슷한 일상을 보낸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해야 하는 일도 매일 비슷하지만 이들의 시선은 늘 끊임없이 반짝이며 변하는 지구를 향한다.
나 역시 나만의 궤도를 돌고 있다. 병원-진료실-약국-집을 반복하며 내 안의 미세한 은하계를 바라보며 돌고 있는 중이다. 하루 열여섯 번의 궤도를 돌면 지구를 빠짐없이 관찰할 수 있는 우주비행사들의 눈은 늘 지구를 향한다. 몽골을 지나 러시아의 동쪽 끝 황무지를, 플로리다의 폭풍을, 중앙아프리카와 카스피해, 일본을 지나 파타고니아까지 이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구의 모습은 없다. 익숙하지만 매일 변하는 낯선 풍경의 지구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열여섯 번.
나도, 이 낯선 생의 조금씩 다른 궤도를 수차례 반복하고 나면, 이 병과 나의 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어질까.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컨디션, 매일 달라지는 통증의 부위를 따라 변화하는 나의 생활은 하루 한 번의 궤도를 도는 것만을 허한다. 분명 열여섯 번이 아니라 더 많은 횟수겠지. 그들이 바라보는 지구처럼, 나는 나를 바라본다. 매일 같지만 매일 다르다. 신기하고도 낯선 나라는 사람의 지금. 비행사들이 실험을 하듯, 그날 그날의 컨디션을, 증상을 일지로 기록하는 것도 이제 익숙한 일상이 되어간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좀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병원들이 하나의 고리처럼 늘어서기 시작했을 때, 몸이 전체적으로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래서, 루푸스가 될만한 인자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발현되지 않은 채로 살았다면.... 이 궤도에 오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발을 딛고 있는 지구를 떠나 아주 멀리서 바라보게 되고 나서야 그곳에서의 소중한 것들과 삶의 의미를 하나씩 곱씹게 되는 우주비행사와, 아무렇지 않던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나서야 그 삶 속의 내가 어떠했었는지를 되짚어보는 나. 우리는 아주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그들의 우주는 외부에 있고, 나의 우주는 내면에 있다. 둘 다 무중력의 고유 속에서 버텨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목숨을 담보로 귀환해야만 멈출 수 있는 우주비행사들의 궤도, 그리고 한번 오르면 목숨을 내놓아야 끝나는 나의 궤도.
‘어찌 보면 인간 문명도 하나의 인생 같다. 우리는 어린 시절 특별하게 키워져 더없이 평범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특별하지 않음을 깨닫고 순진한 마음에 벌컥 기뻐한다. 특별하지 않다면. 적어도 혼자는 아닐 테니까.
… 하찮은 느낌이 하찮은 우리 존재를 위로한다.’
P.53 서맨사 하비의 ‘궤도’
한낮에 병원을 향하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 하늘 어딘가 궤도를 도는 누군가가 있다. 그는 나를 보았을까.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나의 이 궤도도 외롭지 않다. 어쩌면 인생이란 모두 각자의 궤도를 도는 일인 것일지도. 누군가는 질병의 궤도를, 누군가는 관계의 궤도를, 누군가는 상실의 궤도를. 다만 서로의 공전 속에서 우리는 가끔씩 스쳐 지나갈 것이다. 삶이라 부르는 궤도 속에서.
부디 그 짧은 순간에 서로를 발견할 수 있기를.
그래서 위로받을 수 있기를.
p.s.
오늘, 궤도라는 글의 제목에 맞는 이미지를 찾으러 NASA 공식 웹사이트를 여행했습니다.
Earth Observatory라는 탭에서 여러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어 다운로드하려는데, 사진의 이름이 "Suomi를 바라보며(Seeing Suomi)"인 거예요.
수오미.. 가 무슨 뜻일까, 하고 찾아보니.
핀란드(Finland)를 핀라드어로는 'Suomi 수오미'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이 사진은
우주에서 '핀란드' 쪽 지역을 찍은 사진인 거죠.
핀란드가 핀란드가 아니라는 사실에 잠시 어이 벙벙했지만, 왜 그러한지 찾아보다 발견한 [핀란드 사람들도 왜 수오미라고 부르는지 그 어원을 모른다]는 BBC기사를 읽으며 잠시 웃었습니다.
수오미인들. 핀란드인들. 무슨 상관일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우주에서 본 지구는 참 아름답기만 한걸요.
멀리서 보면 우리 삶도 그럴까요?
오늘 어디선가 나름의 궤도를 지나고 있을 당신의 삶도 분명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지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보며, 당신의 궤도에 안녕을 보냅니다.
https://www.bbc.com/travel/article/20180225-the-mysterious-origins-of-finlands-true-n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