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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Nov 25. 2023

최근 부쩍 가까워진 당신에게

오래전, 부쩍 가까워지고 있던, 누군가에게 보냈던 편지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가수 겸 작가인 요조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 책입니다. 그녀는 책을 소개하며 늘 그 속의 한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책 속의 남자는 다양한 이유로 우울에 빠져있는듯 했습니다.


남자는 병든 어머니의 수발을 들며 주변으로부터 효자라는 소리를 시도때도 없이 듣습니다. 남자는 그 효자라는 말 때문에 더 우울해집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효자가 아니니까요. 그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닌, 그냥 해야만 할 것 같은 것들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병환이 깊으시니 오래 살지 못하실거고, 건강하시다면 좋은 일이겠으나 돌아가신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눈 앞의 우울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그냥 한걸음 뒤에서 바라만 본 것이죠.


저는 그 구절 속 잔뜩 가라앉고 끈적하게 엉겨있는 남자의 감정선에 마음이 쓰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목 역시 딱 내가 찾고 있던 책이라고 생각할정도로 좋았고요.


하지만 막상 돈을 들여 배송을 받아 읽어 본 책의 내용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자신의 생활 속 끈적하고 벗어날 수 없는 현실로인해 우울함을 동반자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그래서 자신의 일상 속에서 느낀 모든 상황을 햄릿과 비교하는 책이었어요.


셰익스피어는 커녕 고전에 문외한이었던 저는 당혹스러웠습니다. 글 내용에 공감 할 수 없는것은 물론 무슨 말인지 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거든요. (고전의 정의는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읽어보지 않은 책 아니던가요)


그 책이 일상 속 새로운 쥐구멍이 될 것이라 생각한 저는 실망감에 젖어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저의 쥐구멍, 참새에게 방앗간과 같은 존재인, 미드 '프렌즈'를 켜 정주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렌즈는, 누군가 제게 사랑해 마지않는 티비 시리즈를 뽑아보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안에 있는 캐릭터 하나하나가 매력적이고 스토리 또한 몇번을 반복해 보아도 재미있게 느껴지며 유머코드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 안에 나오는 패션과 색감까지, 30년 전 드라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됐다는 것에 볼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마 정주행 한 횟수를 세어본다면 10번도 넘을거예요.


그런 프렌즈를 제가 사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현실에서 벗어나 또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게 도와주는 쥐구멍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고달파도 웃음으로 상황을 넘기고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그 안에서 피어나는 낭만적인 사랑들로인해 저는 고달프고 우울하고 불안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챈들러는 제게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해 나갔습니다. 다만 그 방법으로인한 부작용도 있었는데,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갈등이 발생하면 정면돌파하지 못하고 무리한 농담을 던져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는 결함이었습니다. 그는 드라마가 막을 내릴때까지 이 결함을 고치지 못했습니다만, 그마저도 귀엽고 매력적이었으며 늘 저를 웃게 만들었기에 결함 아닌 결함, 단점이 아닌 장점이었다고 봐야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어요. 제가 구독하는 ott 어플리케이션에서 프렌즈와 연장 계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몇년전이었다면 프렌즈를 보유하고 있는 ott를 찾아 결제를 했을겁니다. 그러나 제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말았어요. 숨기 위해 쥐구멍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힘든 상황들이 계속되었고 저는 결국 친구들을 손에서 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나흘전, 챈들러가 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챈들러를 연기한 매튜 페리가 사망한 것이죠. 사인은 본인 집 욕조에서 익사. 끔찍하고 허망한 현실입니다. 제 머릿속 챈들러는 여전히 모니카와 가정을 이루고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시덥잖은 농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일반적이고 잘 닦여진, 소위 돈을 받고 파는 에세이였다면 이후의 내용은 사랑하는 캐릭터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딛고 미약하게나마 깨달음을 얻은 화자의 글로 이어지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무엇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우울을 한걸음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에요. 마치 요조가 소개한 책의 작가처럼요.


다만 다행인 것은 그 우울이라는 파도가 온몸을 덮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파도가 일렁이고, 모든 것을 삼키고, 적시는 부분으로부터 바로 한발짝 뒤에 서 있어요. 물론 발 끝은 젖어들어가고 축축한 신발과 양말로인해 찝찝할 수는 있지만 온몸이 젖어 추위로인해 병에 걸리거나 소금물에 익사해버릴 걱정은 없다는겁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살고싶어요. 이유를 묻는다면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를 죽고싶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들은 꽤나 여러가지가 있다는걸 알고있습니다. 인간이 죽고싶지 않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거대한 꿈이라던지 폭발적인 희망이 아닌 작고 소소한 일상 속 즐거움들이라고 생각해요.


이틀전 저는 한 친구를 만나 정도를 넘어서는 과음을 했습니다. 어느덧 나이는 서른이 넘었으나 이십대 초반에나 느낄 수 있었던 숙취를 겪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라고 묻는 주변인들에게는 "같이 마신 사람이 영업맨이라 술을 엄청 마시더라고..." 했지만 사실은 챈들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주변인들에게 "좋아하는 미드 주인공이 죽었어..." 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뻔뻔스럽지 못해서요.


토요일에 술을 마신뒤 일요일 늦은 오후까지는 침대에 머리를 붙인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깨질듯한 두통과 뱃속에서부터 파도처럼 몰아치고있는 울렁거림 때문이었죠. 몸은 '아. 죽겠다 죽겠어' 하면서도 머리는 몸과 궤도를 달리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에요.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 같은 아파트에 살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이제 막 일어난 친구의 집에 가 빈둥거리던 장면이 신체의 고통을 비집고 들어와 머릿속을 떠다녔습니다. 당장 몸을 일으켜 누군가를 만나고 놀고 싶다는 감정이 강렬하게 끓어올랐어요.


저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거나 홀로 보내는 순간을 버틸 수 없어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해야하는, 외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제게 친구라는 것은 일상 속 작은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죽기 싫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즐거움이요. 주말에 홀로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유튜브를 보며 마시는 맥주 한잔, 가끔씩 불현듯 찾아오는 오래된 친구의 전화, 문득 길을 걷다가 느껴지는 그 계절의 첫 냄새, 그리고 당신이 제겐 매일의 즐거움입니다. 꽤나 장황한 빌드업이었죠?


일상 속의 우울과 불안을 순간 순간 잊게 해주는 것들에 늘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매튜 페리는 죽었으나 챈들러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저는 우울과 불안에 젖어있지만 아침에 일어나 당신의 글을 읽고 무슨 답을 보낼까 고민을 하는 저는 살아있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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