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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un 27. 2022

다름이 섞이던 순간을 기억하며

[독서노트]《빛의 과거》은희경






90년대 여성 작가 트로이카로 불리던 신경숙, 공지영, 은희경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던 작가는 사실 신경숙이었다. 〈외딴 방〉을 읽으며 인물의 운명이 마치 내 것인 양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을 체험했었다. 공지영까지도 그랬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영화관에 걸리자마자 달려간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러던 중에도 은희경의 작품은 내게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뭔가, 포장지 한 겹이 글에 덧씌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와 한 발짝 더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트로이카 중 두 작가는 여러 이유로 문단에서 떠나 있게 되었고 꾸준히 책을 내어 ‘작가’라는 타이틀을 유지해 온 은희경 작가는 얼마 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에 게스트로 등장했다. 오래전 자신이 쓴 소설에서 몇몇 부끄러운 점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개정하는 데에 시간을 들였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들었다. 내가 최근에 열광하는 여성 작가들은 적어도 2000년 이후에 문단에 등장한 사람들이고 내가 그들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읽는 동안 몰입하고 동일시한 캐릭터가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달려가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는다거나 폭력을 당한다거나 이용당하고 버려진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은희경 작가는 자신의 옛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성 인물에게 ‘연애의 최종 목적을 결혼으로 두고 그걸 이루지 못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환경을 짜 넣어 주었는데, 이제 와 보니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자기 작품에 대한 반성과 함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근차근 깨어져 나가는 작가를 이 시점에 만나는 경험이 놀라웠다. 오랜 시간 문단에 몸담은 사람이 가진 거룩한 바이브였는데 달려가 ‘언니, 너무 멋져요.’하고 손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소년기 때부터 내 주변 어딘가를 계속 맴돌던 이름이었으므로 더더욱. 그 시절을 지나 내가 도착한 현재를 함께 공유하는 것만 같은 독특한 기분이 들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다음으로 내가 선택한 책은 《빛의 과거》였다. 그리고 난 이번 책이 더 좋았다. 《빛의 과거》는 나의 뼈마디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거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내가 오랜 시간과 지면을 넘어 같은 진동으로 울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제껏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만나온 사람들과 내가 들여다본 자신의 심연, 끔찍한 자아 성찰 같은 것들이 날카로운 문장으로 새겨져 있었다.




2017년의 김유경은 오랜 지인 김희진이 발표한 책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가 대학 신입생 시절의 자기 자신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동기, 선배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음을 알게 된다. 1977년의 기숙사는 다른 성장환경에서 출발한 ‘서로 다른 우리’가 ‘섞임’을 추구하는 공간이었다.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생활하고 활동하고 공부하고, 또 누군가를 배제하고 공격하고 수군거리고, 상처 입고 무너지고 눈물 흘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김유경은 말을 더듬는 약점이 있어 큰 자리에서 발언해야 할 때마다 긴장하며 말의 속도를 늦추곤 했는데, 그 모습은 작가 김희진에게 위선과 가식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고 이로써 김유경은 그녀의 책 속에 ‘세 번째 공주’로 박제된다. 각자가 가진 인격적 결함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김희진은 소설을 도구로 그들에게 은밀한 복수를 한다. 그렇다고 김희진이 뛰어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2017년의 김유경이 화자가 되어 김희진을 묘사하는 장면은 냉소적이기 그지없다. 남들과 다름을 의도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취향까지 조작하는 김희진의 모습을 날카롭게 깎아내린다. 겹겹으로 구성된 다름의 분석과 공격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대체 무엇이 소설이고 누가 서술자인지 모호해지는 경지까지 왔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삶의 기본 태도가 회피 일색이던 김유경이 중년 이후로도 그런 삶을 이어가는 모습은 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뜨끔했다. 성찰을 통해 얻어 낸 원인을 제아무리 심도 있게 분석해 봤자 그것을 바꿀 생각 없이 몇십 년간 이고 지고 살아간다면 그 미래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아서였다. 회초리를 맞는 기분이다. 은희경 작가의 목소리가 이럴 줄은 몰랐다. 난 철 모르는 고등학생 때 몇 페이지 들추어봤던 그 작가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십여 년을 지나 그때와는 다른 세계를 쌓으며 살아가고 있는 내게 은희경 작가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번 책의 말미에도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작품을 꿰뚫는 예리한 서평을 남겨 두었다. 당대의 정치적 공기와 문화적 풍속도를 생생하게 복원, 여성의 입사 이야기, ‘경합하는 진실들의 장’으로의 접근, 또렷한 젠더 렌즈에 포착된 한국 근대성의 성별, 특유의 악력 넘치는 문장…. 무엇 하나 내 취향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오랜 작품을 거꾸로 읽어 나가기로 한다. 2022년의 은희경도 그 시절의 은희경도 지금의 내게는 전혀 다른 모습일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





+) 필사 노트: 진짜 문장들이 너무 좋다. 눈에 짝짝 들러붙는다.



✔️ 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맞은편 대열에서 응원을 보내기보다는 내 곁으로 와서 서는 것.



✔️ 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



✔️ 상대가 줄 수 없는 것을 원하게 된 파탄 난 관계에서는 남아 있는 사랑의 찌꺼기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가족은 마치 좁은 우리 안의 다친 짐승들처럼 맹렬히 서로에게 상처 주기 바빴다.



✔️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 그녀가 어떤 권력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그녀는 그 문장을 쓴 영국 작가의 책에서 한 줄을 더 인용했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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