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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Oct 07. 2022

하지 못한 말

6인 가구 대가족의 최고 연장자가 염치나 배려를 모르는 사람일 경우 문제가 생긴다. 그에게 주어진 가부장적 권위가 실은 가정 생계의 경제적 책임을 지는 자들의 선의와 윤리에 기대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자식 된 도리’는 평생을 걸쳐 아들 며느리 내외를 지배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꽁꽁 묶어 두었다. 그들에게는 중간에 끼어 매일 안절부절못하는 삶을 살았던 그들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가 선명하게 보였다. 더 고생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함부로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착한 사람들은 그렇게 평생 고통받았다.
 
나는 생전에 할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사랑을 내게 준 분인데 나는 언어로 그 사랑을 돌려드리지 못했다. 그깟 말이 대수냐, 할머니도 내가 당신을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충분히 아셨을 것이다 생각해 보지만, 그래도 못내 후회된다. ‘안 했다’기보다는 ‘못 했다’에 가깝기 때문이다.
 
최고 연장자는 늘 작은 일에도 호통을 치고 온몸을 떨곤 했었기에, 할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곧잘 ‘(할아버지를 거스르게 하니)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를 외치곤 했다. 할머니가 최고 연장자의 샌드백이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말을 따랐다. 최고 연장자의 횡포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엄마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긁는 방식으로 생존했고 첫째 딸의 숙명으로 나는 자주 피해자가 됐다. 나 나름대로 금기시했던 말은 나의 ‘좋은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어쭈 네가 뭘 아느냐는 식의 비꼬는 반응이 무서웠고 수치스러웠다.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 마음을 처음 표현했을 때, 온 가족이 깔깔대며 웃어대는 통에 베란다에 숨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생각을 늘어놓는 건 쉬웠어도 감정을 늘어놓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여러 말을 삼가는 것이 나의 담백한 능력이 되어 버렸다. 사회에서 만난 주변 사람들은 나의 과묵함을 높은 가치로 평가하지만 ‘안 하는 것’이 아닌 ‘못 하는 것’이란 걸 그들은 모른다.
 
추석 무렵, 넷째 삼촌네 집에 가 계신 할아버지가 한 번 더 횡포를 부리며 장남네 가겠다고 고집 피웠다는 말을 들었다. 역시나 그 말들은 예민하고 어려운 엄마(=큰형수님) 대신 내게 전달됐고 나는 엄마 집에 찾아가 정제된 말을 전달했고 오해를 풀었다. 늘 하던 일이라 힘들진 않았지만, 어찌 백 세가 가까워가는 동안 정말 평생에 걸쳐 저렇게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하면서 사실 수 있을까. 한편으론 부러웠다. 저 세대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한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고 선한 며느리들까지 만나 평생을 할 말 다 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이 말이다.
 
그날 저녁에 별이와 대화하다가 할머니 생각이 났다. 눈을 감은 할머니의 귓가에다가 누구도 듣지 못하게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할머니만은 들었기를 바랐지만, 세상을 훌훌 뜨고 떠나시는 할머니가 그런 내 말을 듣지 못하고 바삐 가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 별아, 왕할머니 보고 싶다!
- 엄마는 왜 자꾸 왕할머니가 보고 싶어?
- 왕할머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서 그런 것 같아.
- 왜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
- 마음을 말하면 안 된다고 배워서~ 놀림당해서 싫었어.
 
별이가 태어나고 나는 숨 쉬듯 사랑한다는 말을 해댔다. 감정을 표현하는 내게 수치를 주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고 몰아두었던 말을 한꺼번에 별이에게 터뜨렸다. 그러니 별이에게는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 엄마! 내가 천사 나라 있을 때 엄마한테 막 소리 질러서 말하는 거 못 들었어?
- 응. 안 들렸어. 뭐라고 했는데?
- 엄마! 사랑한다고 말해도 돼! 말해도 되는 거야!! 이렇게 크게 소리 질러서 말했어!
 
별이의 말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최근에 할머니가 꿈에 나왔다. 깨자마자 어딘가에 적어두려고 꿈속에서부터 생각했는데, 어느덧 자세한 내용은 다 잊고 할머니가 나왔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았다. 할머니는 행복해 보이지도 불행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계실 뿐이었다. 보인다는 말조차 무의미하다. 그냥 할머니의 마음이 그렇게 느껴졌다. 한 해가 넘도록 보이지 않았던 분이 나를 찾아오셔서, 손녀를 위로하지도 반기지도 않으며 곁에 있다가 간 그 밤이 자주 떠오른다. 나는 악을 쓰며 할머니께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모습을 한 다른 누군가면 어쩌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이제 할머니를 보아도 사랑하는 마음 그 하나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슬퍼졌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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