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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Nov 19. 2022

영생과 파라다이스

[독서노트] «어디선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켄 리우 단편 모음집.


'기술 발전'하면 떠오르는 파란 눈의 과학자와 그들이 만들어낸 서구형 로봇 때문에 SF의 배경을 서양의 어느 국가로 상정하곤 했는데, 켄 리우는 그런 편견을 뒤집었다. 그러고 보면 서양인들 환장하는 SF 단골 소재 호접지몽 동양  아닌가. 동양 어느 오지의 고립된 부족의 이야기에서부터 삼국지 관우를 모티프로 한 이야기까지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이 롤러코스터 같다. 이 책 읽고 좋아서 지금은 «종이 동물원» 찾아 읽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싱귤래러티 3부작으로 이름 붙은

카르타고의 장미, 뒤에 남은 사람들, 그리고 표제작인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의식을 복사하여 디지털 장소에 보관할 수 있게 되며 죽음 대신 영생과 파라다이스가 보장된 미래 사회 배경의 연작 소설인데, SF 소재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재라 더욱 눈길이 갔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에서 반복 재현되고 있다는 건 언젠가는 이게 현실이 되리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켄 리우는 디지털 보관 장소로의 의식 이동을 '싱귤래러티'라고 이름 붙였다.


켄 리우는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싱귤래러티 이전의 삶을, <뒤에 남은 사람들 >에서 싱귤래러티 원년 이후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모습을,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서 중력의 향수를 잊지 못해 결국 고철 덩어리 육신이라도 갖길 원하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카르타고의 장미>의 주인공 리즈에게 육신은 불필요한 기억을 새겨놓는 장소였다. 그는 육신이 없어도 생존할 수 있다면 인류는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화 되지 않은 살아 있는 뇌, 의식의 보관 장소를 백업하는 실험에 자원한다. 마취도 없이 뇌를 분해당한 뒤, 리즈는 죽고 실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유족인 언니에게 리즈의 의식이 백업된 실리콘 웨이퍼 스무 장이 전달된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선구자 리즈 이후 싱귤래러티가 상용화된 시절로 간다.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지구에 남은 인류는 이제 얼마 없지만, 그들은 인간이라면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는 강한 의지를 다지며 생존한다. 자원이 부족하고 환경이 파괴된 데다가 약탈자들이 들끓어 생존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왜 이런 세상에 나를 낳았냐'라는 의문을 가진다. 디지털 세계로 건너 간 (이들 기준에서의) 망자들은 끊임없이 이들을 유혹한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모두 사라진 채 의식을 가진 자들은 모두 디지털 보관 장소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여러 명의 의식을 복사하여 번식한다. (한 아이의 부모 자리가 8명씩 되기도 한다.) 아직 어린 파예트에게는 고대인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엄마가 있는데 엄마는 먼 행성의 고철 덩어리 로봇에 자기의식을 심고 탐험하고 싶어 한다. 엄마는 중력이 무엇이었는지 고대의 도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3부작은 이와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의도와 출발, 회귀.


파예트의 엄마는 고철 덩어리가 되더라도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땅 위에 서고 싶어 했다. 의식을 가진 자끼리의 소통은 언어가 필요 없이 그저 감지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서로 간의 오해가 존재할 리 없지만, 엄마는 파예트와 긴 시간을 들여 고대의 장소를 여행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 싱귤래러티 시대에 사라진 고대인의 방법으로.


3부작을 거쳐, 그리고 인물들에게는 그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다시 현재의 우리 모습이 나타났다. 제어할 수 있는 유기체 몸을 가지고 도서관 통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며 세상을 탐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돌아온 거다. 근미래의 인류가 오래도록 고민하고 실험하여 펼쳐놓은 세상에서 그들은 다시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회귀하고 싶어 했다. 둘 중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완벽하지 못한 몸을 가지고 중력과 오감을 넘치게 느끼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현재의 당신들이야말로 파라다이스에 있는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동시에 받았다. 전율이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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