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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an 14. 2023

많은 이가 이런 위무를 원하고 있을까

[독서노트]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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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판은 2015년, 이후 10만 부 판매를 기념하여 다시 마케팅하는 책이다. 현재 베스트셀러 칸을 차지하는 책이지만 8년 전과 내용이 크게 달라졌을 리도 없고 작가 신상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다. 제목을 바꾸었고 표지를 갈았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독자들이 최근 들어 선배들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새삼 이것이 되었다거나, 혹은 출판사의 훌륭한 마케팅 덕분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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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어조는 이어령, 김형석 님의 최근 저서들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정신과 의사로 오래 일한 저자가 현장에서 여러 환자를 만나며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여러모로 연구해 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시발점이 어디든 이야기하는 내용은 비슷하다. 전체적인 인상은 ‘착한 책’이라는 것이다. 나쁘거나 뾰족한 말이 하나도 없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일관된 톤으로 서술되다 보니,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는다.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어르신들의 책을 자주 접하다 보니 차례만 봐도 어떤 이야기를 할지 대충 감이 잡히는 경지가 됐다. 예를 들어 책 속의 ‘완벽한 때는 결코 오지 않는 법이다’라는 글 제목만 보아도 ‘그러므로 현재를 살고 도전하라’라는 문장이 나올 것이 예측되고, ‘나쁜 감정을 가졌다고 자책하는 사람들에게’라는 글 제목을 보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소할 수 있다’라는 문장이 예측된다.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아이는 아이의 길을 걷게 할 것이다’라는 소제목에서는 당연히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챕터별 소제목만 보아도 전체적인 내용이 예측되기에, 차례만 읽어도 책을 읽은 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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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프로필을 살펴본다. 작가 김혜남 님은 국내 유수의 대학을 나와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개인병원을 연지 1년 만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작가 인생의 역경은 첫 번째 학창 시절 친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두 번째 혹독한 시가 살이, 세 번째 첫아이의 유산, 네 번째 투병이다. 그리고 이 모든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일어서 내일을 향해 나가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다룬다. 마음이 괴롭다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여러 어려움을 작가는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위무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글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작가가 된다. 책을 낼 정도로 글을 다룰 줄 알려면 공부도 일정 수준 이상 해야 하고 매일 스스로 반성하고 갈고닦는 태도도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안정적인 자리에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들의 역경은 탄탄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이 하는 말이 일단 워낙 좋은 말이기에 좋은 책으로 출판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보다 더한 역경을 겪은 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는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후자 쪽이 더 궁금하다. 글도 모르고 책도 모른 채 살다가 노년이 채 되기 전 혹독한 질병에 바닥까지 팬 채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편이 더 ‘살아 있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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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챕터부터 ‘무섭고 끔찍한 병에 내가 걸리고야 말았다’는 내용이 차근차근 서술될 때에 나는 우리 아빠를 떠올렸다. 우리 아빠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매일매일 약과 함께 사신지 꽤 됐다. 파킨슨병은 대개 치매와 함께 오기 마련인데, 작가는 치매가 오지 않아 투병 내내 책도 쓰고 예술도 하며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아빠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에 연필을 잡고 선 긋기, 단순 계산하기 등 치매 예방 문제지를 풀던 것이 생각났다. 작가가 이 끔찍한 병에게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장면을, 그리고 상세한 증상 서술을 할 때마다 나는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에게 펜이 쥐어진다면 어떤 말을 쓰게 될지 궁금했다. 아빠의 말을 듣는 것이 내게 더 ‘살아 있는’ 이야기로 다가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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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책은 누구를 위한 책일까. 몇 년 안에 몇억을 모으고 서울 아파트를 사고 경제적 자유를 이룬다는 수많은 자기 계발서를 모두 섭렵한 후에, 혹은 인생의 완숙한 어떤 시점의 도입에서 읽을만한 책일까?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먼저 산 이들의 말을 듣고 있는 데에도 젊기에 놓을 수 없는 어떤 것들에 얽매여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 수없이 자문할 것이고, 그것에 응답하는 인생 선배들의 책은 계속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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