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도라는 숫자는 나에게 단순한 기온이 아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이다. 서울이 또다시 38도를 넘긴다고 한다. 2025년 7월의 마지막 토요일, 뉴스 속 기온 숫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해가 있다. 1994년 여름. 기록적인 폭염이 서울을 덮쳤던 그 해, 나는 신림동 고시촌에 있었다.
91학번이었던 나는 94년 여름, 행정고시 합격이라는 인생의 꿈 하나를 본격적으로 가슴에 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고향으로의 귀향 대신 곧장 고시촌들이 모여있는 신림동으로 향했다. 신림 9동이라 일컫는 고시촌은 다닥다닥 붙은 원룸촌과 하숙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2평 남짓한 방 한 칸과 숙식이 제공되는 고시생 합숙 공간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9시간 공부.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저녁 3시간. 규칙적인 일상.
아침엔 같은 식당에서 고시생들과 밥을 먹고, 곧바로 공부방에 들어갔다. 오전 시간은 비교적 능률이 좋았다. 머리도 맑고, 집중도 잘됐다. 하지만 문제는 오후였다. 뙤약볕에 방 안은 찜통 같았고, 선풍기는 더운 바람만 내뿜었다. 공부는 고사하고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는 게 하루 일과의 중심이 되곤 했다.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면 어느새 저녁시간이었다. 저녁도 역시 같은 식당. 같은 얼굴들...
그때가 되면 고시촌에도 해가 조금씩 기울었다. 뜨거운 열기가 살짝 누그러지는 저녁 무렵, 나는 신림동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좁고 복잡한 골목이었지만, 그 속에서 잠시나마 나를 되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굳은 몸을 풀고 싶었고, 시멘트 냄새와 섞인 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독을 달래고 싶었다.
94년 여름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단지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그해 여름, 미국에서는 월드컵이 열렸다. 한국은 아쉽게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그해 월드컵은 나에게 그 어떤 월드컵 보다 내 마음속에 더 가까이 남아있다. 시간을 불문하고 우리 팀 경기가 열릴 때마다 식당에 설치된 TV 앞에 고시생들이 모여들었고, 경기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열기, 환호, 아쉬움…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그 모든 감정은 다시 수험 교재 속으로 돌아가는 연습이 월드컵 기간 동안 반복되었다.
그리고 7월 초순, 그 열기를 단번에 식히는 뉴스가 터졌다. 북한 김일성 사망.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해진 그의 사망 소식은 세상을 멈춰 세웠다. 고시촌도 마찬가지였다. 식당 안에 흐르던 뉴스 자막, 고시생들의 낮은 탄식과 걱정. 누군가는 “전쟁 나는 거 아냐?”라고 속삭였고, 또 누군가는 “이제 한반도도 변할 것”이라 말하던 그 순간. 내 공부에도, 내 인생에도 무엇인가 뚜렷한 전환점이 생긴 듯했다.
2025년 7월 서울의 여름...
나는 에어컨이 빵빵한 사무실에 앉아 있지만, 땀 냄새와 선풍기 바람 속에서 고시서적을 넘기던 그 여름의 내가 문득 그립다. 햇볕은 뜨거웠고, 세상은 시끄러웠고, 미래는 불투명했지만...그 여름 만큼 인생이 순도 높은 열정으로 채워졌던 적이 또 있었을까?
더위, 공부, 월드컵, 역사적 뉴스...
그 모든 것이 뒤섞였던 1994년의 7월, 신림동에서 마주한 그해 여름은 나에게 단순한 여름이 아니었다. 38도는 청춘의 온도였고, 희망의 무게였고, 땀과 열정의 총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꿈을 다졌고, 세상의 변화를 목격했으며,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30년이 지난 2025년 7월...또 다시 38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