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실력 #10
『실패의 실력』 6 면허 따자마자 포르쉐 풀옵, 벤츠, BMW 구입하다.
겨울이 그렇게 지나갔다.
얼어있던 땅이 녹고 다시 조금씩 봄 기운이 폭발하던 그 시기
마음을 다시 잡은 나는 센터의 옆 사무실에 있던 대표에게 부탁했다.
"대표님, 인턴들 쓰고 있는 책상 하나만 빌려주세요."
그렇게 옆 회사의 인턴들이 쓰고 있는 복도 한 쪽 구석, 책상 하나를 빌렸다.
나란히 옆에 앉아있던 그 회사 인턴들이 "쟨 뭐야?"하는 눈으로 흘깃 거렸다.
불과 몇 개 월 만에 직원도, 사무실도 없이 그 지경까지 되어버렸지만 아직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
우선은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돈 문제’였다.
정부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법인 명의로 대출한 사업비 수억 원이 강한 압박으로 마음을 짓눌러왔다.
개인사업자와 법인사업자는 다르다.
법인은 대표자와는 별개의 ‘법적 인격체’다.
말인즉슨 내가 설립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르게 해석하면, 굳이 법인의 대표자가 A부터 Z까지 법인의 모든 책임을 질 법적 의무는
(횡령, 배임 등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 솔직히 고백하건대, 고민했다.
법인을 파산시켜 버리면 적어도 수억 원의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만으로 서른 살, 혼자 온전히 떠안고 있기에는 액수가 너무 컸다.
내가 그 돈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열심히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었을 뿐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정말 피 나게 노력했건만 왜 그 실패는 나 혼자 떠맡아야 된단 말인가?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은행대출의 보증을 서준 신용보증기금의 담당자도,
대출을 실행해준 은행의 담당 과장도 해가 바뀌면서 이미 다른 지점으로 간 터였다.
내가 그 돈을 갚지 않고 법인을 파산 시켜버린다고 해도
누군가 그 일에 대해 강하게 책임을 지거나 피해를 입을 사람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없어 보였다.
연예인, 유명 정치인, 심지어 대기업들도 이런 식으로
수 틀리면 자신들이 세운 법인회사를 부도내고 ‘나 몰라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곤 정작 본인들은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경우가 우리사회에는 정말 많았다.
정말 실리적이고 약은 사람들이다.
"사람이 그런 면도 좀 있어야지" 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겠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도덕의 문제이지 법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 솔직히 내 친구나 내 가족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나도 그렇게 하라고 말할지 모를 일이다.
그걸 미련하게 뭐하러 너 혼자 갚고 있냐 고. 답답해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안타깝게도) 나는 고지식한 사람이다.
내가 결정한 하나하나의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오롯이 나에게 있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른 뒤로 적어도 법인명의의 빚을 모두 갚기 전까지는 폐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미혼이다.
책임질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깐 그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정이 있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겠지만.
“그래, 애스크컬쳐야. 같이 가자. 이제 옆에 너만 남았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사업을 찾아야 했다.
일단은 돈부터 다시 벌어야 했다.
이 시기에 정말 고민 가득한 제안이 왔다.
영국 지사가 있었던 '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 (R,C,A. 영국 왕립예술대학교)'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센터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망해버린) 사정을 다 알고 있는데,
그렇게 포기하기엔 아까운 사업이니, 한국문화 공유플랫폼 에서 '한국'을 빼고
그냥 '문화 공유 플랫폼'으로 운영하는 게 어떻겠냐고,
영국에서 사업을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깊이 고민했지만, 나는 결국 그 길을 택하지 못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평생 모은 재산을 그렇게 써버렸다가 만약에 거기에서 실패한다면?
그땐 정말 다시는 회복 불가능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20대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전했겠지만,
이미 나도 늙어버린 것이다. 몇 번의 실패를 연달아 겪고는 많이 위축되고 보수적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루프탑 00하루'를 오픈했다.
카페는 아니었다.
방송촬영장으로 대관해주는 렌탈 스튜디오 개념이었다.
서울 서대문구의 허름한 단독 주택을 임대 해서 내외부를 완전히 뜯어 고쳤다.
수 개월 간 직접 공사했으며,
전체적인 디자인부터 전구 하나, 소품 하나까지 깊은 고민 끝에 지었다.
원래의 이 공간의 공사 목적은,
나 혼자 한국문화 공유플랫폼을 계속 운영하면서
외국인과 한국인이 여러가지 한국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공간에 놀러왔던 어느 스타트업 대표의 추천(소개)으로
길 건너편 상암동에 있는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게 됐다.
SNL코리아 프로그램 제작팀이었다.
그때부터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방송촬영 장소 대관'으로 운영하게 됐다.
그리고 초대박이 났다.
유재석, 김용만, 송은이, 김숙, 정형돈, 민경훈, GOD, 박민영, 성시경, 에이핑크, 비,
맛있는 녀석들, 스트레이 키즈, 뉴이스트, 나문희, 인순이, 이광수, 김종민 등등.
대한민국의 유명한 배우, MC, 방송인, 희극인, 가수 등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소설가, 시인, 정치인, 예술인, 스포츠 스타 등
각계 각 분야의 셀럽들도 각종 영상이나 인터뷰 촬영을 위해 찾아왔다.
영화, TV 드라마, 웹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콘텐츠, 광고 등
많은 콘텐츠들이 ‘루프탑 00하루’에서 촬영됐다.
넷플릭스의 한국 첫 자체제작 프로그램이었던 <범인은 바로 너>라는 프로그램도 촬영을 왔다.
한국문화 공유 플랫폼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그걸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자 사무실로 만든,
'루프탑 00하루'는 생뚱맞게도 ‘촬영 스튜디오’에 매우 제격이었던 것이다.
따로 홍보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한번 방송가에 입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여러 제작진에게 계속 대관 요청이 들어왔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장사가 잘 되고 있는 셈이었다.
오픈 한 이래로 이후 3년 간 큰 탈 없이 꾸준히 영업이 잘 됐다.
***
“나는 지금 일어났어. 다들 출근 잘했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 휴대전화 메신저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휴… 진짜… 네가 제일 부럽다. 인마.” 친구 하나가 답했다.
전날에 과음을 했다.
마침 루프탑 00하루에 대관이 없던 일요일이라 부랴부랴 친구들을 초대했고 늦게 까지 모임을 가졌다.
새벽녘에 속이 안 좋아 일찍 눈을 뜬 이후로 화장실을 두 번 다녀왔고
그 사이 잠은 달아나 결국 세수와 양치를 했다.
안경을 끼고 침대에 누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기 시작했다.
수십 번도 더 읽은 책이었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쯤엔 어느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한숨 더 잠을 잤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 일어났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친구들이 전날 모임 때 찍은 사진을 공유하며 "어제 정말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월요일이라 괴롭다고 빨리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오늘 하루도 힘들 내자”라고 말한 뒤 누워서 점심 메뉴를 고민했다.
오후엔 촬영팀이 왔다. 대충 세수만 한 채로 PD에게 대관 이용 규칙에 대해 설명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 오후는 뭘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시간을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다들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으니.
결국 누워서 휴대전화로 영화를 몇 편 보고
새벽녘에 읽었던 하루키의 다른 책을 찾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촬영팀은 자정쯤 되어서야 철수했다.
매너가 좋은 팀이라 뒷정리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그들이 다녀간 자리를 잠시 청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그날 촬영팀이 지불한 반나절 대관료는 X00만원이었다.
***
촬영팀이 3, 4일 혹은 그 이상의 일정으로 대관하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났다.
혼자도 갔고, 부모님과도 갔고, 친구와도 갔고, 조카와도 갔다. 3년 간 이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도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도 단둘이 여행을 갔다.
귀여운 내 사랑, 어머니
미운 우리 아버지
교토에서 카페를 하고 있는 친구와 아버지.
안타깝게도 이 친구 역시 코로나 이후로 폐업을 했다
아들이 여행 자주 시켜주니깐 신이 난 엄마와 아버지.
부모님께서 이렇게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지켜 볼 때,
처음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강하게 생겼다.
(나는 사실 돈 욕심도, 개념도 없다)
사촌 조카와도 갔다. (숨겨둔 아들 아닙니다-_-)
입국카드 직접 적어보라 했더니 '건담 보러'라고 써둔 조카.
교육 잘 시켰죠?
주로 일본으로 갔는데
부모님께서 온천을 좋아하시고 조용하고 깨끗하며,
'아키하바라'와 '덴덴타운'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평화로웠지만 불현듯 심장이 크게 뛰고,
갑자기 주위가 새까맣게 어두워지며 두 다리로 딛고 있는 땅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은 철렁함이 있었다.
힘들게 살다가 별안간 편한 삶을 맞이한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미도리처럼,
정체모를 막연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하루하루 쉽게 흘러갔다.
“내 인생이 이렇게 편할 리가 없는데…”
루프탑 00하루를 운영한지 2년 차가 된 그해 연말에는 뒤늦게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스무 살, 면허를 취득하던 과정에서 도로주행을 할 때였다.
신호를 위반하고 달려오던 버스와 크게 사고가 날 뻔했다.
이후로 운전은 강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평생 면허 없이 살았다.
그랬던 내가 십여 년 만에 운전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고친 건, 순전히 엄마 덕분이었다.
엄마가 20년이 넘은 소나타를-그나마도 아빠가 아는 사람에게 중고로 얻어온 차였다-운전할 때였다.
내부순환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멈춰버려 혼자 있던 엄마가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집에 돌아와 충격으로 얼이 빠져서 몸을 가늘게 떨고 있던 엄마를 위로하며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나 돈 잘 벌잖아. 내가 좋은 차 사줄게.”
그 길로 면허학원을 등록했다.
막상 운전대를 잡아보니 운전이라는 게 제법 할만 했다.
교통 법규만 잘 숙지하고 방어운전을 습관화한다면 운전을 무서워하거나 기피할 필요가 없었다.
면허를 취득한 날,
외관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 낡아서 카센터 직원이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타시라"고 했던 소나타는 바로 폐차했다.
부모님께 즉시 출고 가능한 작은 메르세데스를 구입해 선물했다.
부모님께서는 정말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친구들에게 자랑도 많이 하신 것 같았다.
벤츠에서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건만...
조금 더 좋은 차를 사드릴까 하는 후회도 스쳤다.
그리고 별개로 패밀리카를 고심 끝에 골랐다.
포르쉐의 신형 라인업인 ‘카이엔 쿠페’였다.
개인적인 감상평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내 눈에 이 차보다 예쁘고 멋진 차는 없었다.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라 거대하고 육중했지만 동시에 쿠페라 매끈하고 날렵했다.
지난 가을에 먹어둔 식사가 다 소화되지 않은 채 이제 막 겨울 잠에서 깬 곰 같다고 해야 할까.
뚱뚱하지만 둔해 보이지는 않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무척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차였다.
옵션을 최대한으로 넣어서 계약했다. 이건 가족과 함께 다닐 때 탈 목적이었다.
포르쉐 센터의 담당 딜러는 “계약이 밀려 있어서 출고까지 대기 시간이 최소 1년에서 1년 반 정도입니다.”라고 했다.
상관없었다. 이제 막 면허를 취득한 상태라 운전에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계약 선물로 웬 장난감 차를 보내줬다.
플라스틱 내구성이 어찌나 약한지
장난감은 조카(일본 여행 데려갔던)가 달라고 해서 줬다.
그리고 얼마 뒤 킬로수가 얼마 안되는 중고차를 한 대 더 구입했다.
BMW의 컨버터블 차량이었다.
엄마... 패션이;;;;
면허를 취득하자마자
메르세데스를 부모님께 선물하고, 동시에 가족 차로 포르쉐를 계약하고,
내 전용 펀카로 BMW 컨버터블을 구입한 그때
나는 걱정거리가 없는 게 걱정일 정도로 평화롭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공간을 대관해주면서 속이 들 끓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다, 더 솔직해야지. 속이 뒤집히는 일이 너무도 잦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세상에는 머릿속에 정말로 상식이라는 것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
별의 별 인간들이 다 있다는 걸 온 몸으로 체감하던 시기였다.
공간을 더럽게 쓰고 도망가는 팀들은 애교였다.
온갖 것들이 소모품이 되고 있었다.
집 뼈대를 제외한 모든 것이 돌아가면서 파손되고 훼손되었다.
수입이 100이라면 최소한 40 정도는 매번 파손된 것들을 고치거나 새 것으로 교체하는 비용으로 써야 했다.
촬영팀이나 대관팀이 와있는 동안엔 지근거리에 있는 본가에서 꼼짝 않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현금이 가득 보관된 창고를 지키는 경비원처럼 CCTV를 노려봤다.
공간에 문제가 생기진 않는지,
대관 중인 팀이 이웃주민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는 않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했다.
(이웃의 집 앞에서 집단으로 흡연을 한다거나, 쓰레기를 투척한다거나,
골목을 차량으로 막는다거나, 큰 소음을 일으킨다거나,
늦은 밤 촬영용 조명을 이웃집에까지 닿게 한다든지 하는 등)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뛰어갔다.
청소도 늘 혼자서 직접 했다.
공간이 너무 넓고 청소할게 많아서 청소도우미를 한 번에 3명은 불러야했는데
매번 시간 맞추기도 번거롭고 성에 찰 만큼 깨끗한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나 혼자 하는 게 마음 편했다.
몇 년 간 나는 어느새 청소의 달인이 될 정도로 그 넓은 3층 짜리 주택을 혼자서 매일 청소했다.
촬영을 끝낸 어느 촬영 팀이 자기들끼리 뒤풀이를 한다고 과음을 했던 모양인데,
그중 하나가 술에 취해 (어떻게 취하면 그럴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화장실을 박살냈다.
근처 본가에서 대기 중이던 나는 건물이 무너진 것 같은 그 큰 굉음에 화들짝 놀라 뛰어갔다.
도착해보니 변기며, 세면대며, 바닥과 벽의 타일이며, 모든 게 부서져 있었다.
흡사 포클레인이 철거를 위해 휩쓸고 간 듯 했다.
“아…, 술이 너무 취해서요, 미안합니다”
라며 전혀 미안한 것 같지 않은 말투로 공사비는 변상하고 갔지만
저 난장판이 된 화장실에서 오물이며 구토며 이런 것들을 치우고 있노라니,
세계를 누비고 꿈이 넘치던 시기의 옛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대충 이 정도의 상식 밖 일들이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공간에 화장실이 3곳이나 있음에도 대소변을 아무 대나 봐버리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았다.
똥 오줌을 가릴 나이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한창 때의 나를 보며 대단한 청년이라고 우러러봐줬던 사람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이를 테면,
그 몇 년 사이에 (우리 회사 미국 일을 봐주던) 제임스는 와튼스쿨에서 MBA를 졸업하고
뉴욕 맨해튼의 월가에서 금융 애널리스트로서 자기 입지를 넓히며 글로벌 무대의 중심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같이 사업을 고민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던 ‘000’의 000 대표는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까지 시켰다.
내가 남의 오물이나 치우고 알량한 수입에 만족하며 완전히 주저앉아있던 시기에
그는 회사를 시가총액이 2,000억이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제 더 이상 나는 그런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동안 꼴에 강연이랍시고
그렇게나 도전이네, 모험이네 떠들고 다닌 이야기를 들어줬던 학생들은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인생의 황금기를 배짱이 마냥 아주 꿀 같이 놀며 보냈다’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셈이다.
아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말이다. 스트레스 받는 날의 연속이었다.
책을 내기 위해 2년 동안이나 매일 출판사한테 거절당했던 때에도,
우리유통과 애스크컬쳐라는 사업이 각각의 이유로 완전히 실패했을 때에도
전혀 끄떡없던 정신이었다.
사람에게 매일 끊임없이 치이며 스트레스 받고,
그 시간을 아무 발전 없이 허송세월로 보냈다는 자괴감까지 더해지자 멘탈이 버티질 못한 것이다.
정말이지 나로서는 대단히 황망하고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시기-루프탑 00하루에 촬영팀이 매일 오던 시기-는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
일하는 시간 대비로 따져본다면 사실 ‘꽤 성공했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요즘 유튜버나 책장사들이 카피문구로 지겹게 내거는
'경제적 자유'인지 뭐시깽이에 가장 근접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오히려 정신이 가장 피폐했다는 것은
성공의 기준을 돈으로만 생각했던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물질이 풍요로운데 정신은 피폐하다니? 내 상식으론 앞뒤가 안 맞았다.
삶의 중요한 무언가를 잃은 채 인생이 공허하다고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굳이 전성기를 꼽으라 하면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그 시기는 오히려 맨 후순위였다.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참말로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차에 대한 로망이나 환상이 전혀 없었기에 면허 취득 직전까지는
포르쉐와 포드, 현대와 혼다 마크도 구분할 줄 몰랐다.
그 정도로 차에 별 관심도 없던 내가 면허를 취득하자마자 수억 원 짜리 차를 구입했던 건 순전히 자격지심인 셈이다.
남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고, 무척 잘 지낸다고.
***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눈곱만큼도 예측하지 못한 재앙이 닥친 것이다.
‘미래를 대비하지 않은’ 대가가 찾아왔다.
기존에 대관을 예약했던 팀들이 줄줄이 예약을 취소하며 환불을 요청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새로운 대관 문의는 아예 없다시피 했다.
불길한 쪽으로는 촉이 기가 막히게 발달한 내 직감이 경고했다.
‘코로나19인지 뭔지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라’라고.
1년 반을 넘게 목 빠져라 기다렸다가 이제 막 인수했던 포르쉐는
그래서 두 달도 채 타지 못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했다.
허세 따위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메르세데스도 팔아야 할 것 같았지만
그 차는 이미 온갖 생색을 내며 부모님께 완전히 드린 후였다.
이미 부모님의 신발이 되어버린 녀석을 다시 돌려 달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팬데믹이라는 악몽의 시작은 그 정도로 심각하게 다가왔다.
새 차나 다름없던 그 포르쉐를 사간 사람은 나보다 한참 어린, 젊은 대표였다.
체인 레스토랑으로 경기남부 지역에서 프랜차이즈 요식업을 제대로 성공시키고 있는 아주 어린 친구였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포르쉐를 두 달 만에 팔아야 한다는 아쉬움과 박탈감보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어느 청년이 팬데믹이라는 이 최악의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사업을
–그것도 팬데믹으로 인한 타격이 가장 큰 업종 중 하나라는 요식업을- 성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팬데믹의 시대를 맞아 ‘어쩔 수 없다’며,
그저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만 있었는데, 이 와중에도 성공하는 이들은 있었다.
“아이고, 대표님. 좋은 차 감사히 잘 타겠습니다.”
그 대표가 찾아와 차를 인수해 가던 날, 밝은 표정으로 겸손하게 말했다.
차를 몰고 출발하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떼를 써서 억지로 타낸 트로피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 루프탑 00하루로 돌아왔다. 물론 걸어서. 차는 방금 다른 이에게 넘겼으니.
2월말,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꽃샘추위가 심했다.
하늘에는 작은 눈발이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다.
눈 밟은 신발이 젖어서 발이 시렸다.
섬뜩할 정도로 찬바람이 가슴팍을 파고 들어왔다. 봄이 아직 멀리 있음을 경고하는 냉기였다.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부터는 현실이다. 팬데믹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내 안을 돌아봐야 했다.
왜 늘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어디부터 문제가 있던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왜 또다시 실패했던 걸까.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더 잘해낼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우선 과거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실패의 실력』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