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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Jun 20. 2024

외할머니, 안녕히..

살갑지 못한 손녀의 마지막 인사

4월의 마지막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락을 받았을 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작년 여름 밭에서 쓰러지신 할머니를 발견하고 부축해서 집으로 모셔오는데, 할머니 팔다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나 혼자 부축하는 게 힘에 부쳤을 때 이미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밭에 가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자꾸만 밭에 가려고 나왔다가 넘어져서 다쳤고, 결국 요양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평생의 밭일로 허리가 완전히 꼬부라진 할머니는 기다시피 해서 자꾸만 밭에 가려 갔고, 요양병원에 가서도 계속 밭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본인 몸을 걱정하는 대신 밭만 걱정하는 것을 보고, 엄마는 화를 내며 속상해하셨고, 그런 엄마를 보며 나는 '모녀는 다 비슷한가'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엄마가 본인 몸보다 다른 일들을 먼저 챙기는 것을 두고 속상함에 자주 화를 냈으니까.


외할머니는 종교가 없으셨지만 외할머니를 내내 극진히 모신 외삼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외삼촌들 다수가 기독교인이어서, 장례 의식은 기독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입관식 때 목사님이 오셔서 함께 기도를 드렸는데, 평소 종교가 없던 나 그 순간만큼은 천국이 있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랐다. 천국이 있다면, 우리 외할머니는 반드시 천국에 가실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골 할머니들 중에서 우리 외할머니만큼 순한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짜증이나 화를 내는 적도 없었고, 남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경우도 없었다. 말투가 순했고, 성정이 착했다. 할머니가 주님 옆에 가실 것이라는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외할머니가 가실 천국이 있기를, 거기서는 할머니가 여기서보다 조금 더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순하고 착했던 외할머니는 장례식장 입관식에서 자식들을 아주 속상하게 했다. 당뇨로 살이 없어 아주 말랐던 외할머니 얼굴이 너무나 부어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우리 엄마외할머니 얼굴을 보고 다른 사람하고 바뀐 것 같다고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붓기가 너무 심했다. 근래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모, 할머니는 입관식 때 생전 모습 그대로였는데, 유독 외할머니만 얼굴이 엄청 부어 있어서 외할머니의 모진 고생과 겹쳐지며 마음이 참 속상했다.


또 한 가지 속상했던 것은 2박 3일의 장례 절차 동안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떠오르는 게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 가지 정도의 일화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때 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에 어떤 노래가 나오자, 할머니가 어렸던 내게 가사를 종이에 옮겨 적어달라고 했다. 인터넷은커녕 음반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시대에 할머니가 노래를 외우려면 가사를 보고 계속 불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지 않은 할머니에게는 흘러가는 노래 속도에 맞춰 가사를 옮겨 적는 게 아무래도 버거웠을 것이다. 어렸던 나는, 할머니들은 일만 하는 줄 알았던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외우려고 노력하던 할머니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고, 어린 손녀에게 스스럼없이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도 좋다고 느꼈다. 어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열심히 가사를 받아 적던 기억이 난다. 빠르게 잘 적는다는 칭찬을 받고 뿌듯했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를 위해 노래 가사를 받아 적던 어린 손녀도 노래를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라나서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사고, 종종 콘서트에도 간다.


그리고 내 치열이 고르지 못해 아쉬워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어릴 때 나는 할머니들은 손자손녀를 무조건 예쁘다고만 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외할머니는 외모에 대해 꽤 엄격한 편이었다. 통통한 손녀를 보고 통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살이 쪄서' 예쁘다고 정확한 평가를 곁들이는 식이었다. 그런 외할머니는 어느 정도 큰 나를 볼 때마다 "다 예쁜데, 이빨이 고르지 못해서 아쉽다. 그렇지만 괜찮다. 나중에 커서 교정을 하면 된다"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가족과 친구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치열 지적이었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한 문제점이었는데,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외할머니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내 치열이 고르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시험 합격 후 곧바로 치아 교정을 시작했고, 교정 과정에서는 시간도 많이 들고 통증 때문에 고생을 좀 했지만, 교정 덕분에 충치도 덜 생기고 전체적인 인상도 훨씬 좋아져서 지금까지도 만족하고 있다. 외할머니가 내 치열을 지적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교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할머니 덕분에 고른 치열을 갖게 된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화 말고는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일화가 없었다. 외갓집은 친가와 같은 동네에 있었고, 방학마다 시골 동네에 가서 오래 머물렀는데도 이토록 추억이 없다니.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면 주로 친가에서 친할머니와 지냈기 때문에, 외할머니는 친할머니를 어려워해서 친가에 거의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낮에 외가에 놀러 가도 외할머니가 밖에 일하러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외할머니와 오래 길게 대화를 나눈 적도 많지 않고, 그래서 이렇다 할 추억이 없다. 슬펐다.


그리고 후회되는 일도 있다.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가신 이후로 사촌동생 결혼식 때,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외출 나온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는데, 밥을 많이 못 드셔서 그런지, 말랐던 외할머니는 더 야위었고, 말수도 점점 줄어들어서 마음이 참 아팠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할머니와 헤어질 때 '밥을 잘 드시라'는 정도의 짧은 말조차 겨우 건넨 나는 참 못난 손녀다. 천사 같은 우리 외숙모처럼 '할머니가 있어서 너무 좋다, 할머니가 건강해지면 더 바랄 것 없이 좋겠다, 할머니 어서 건강해져서 나랑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자' 이런 다정한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다정한 말들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입을 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다정한 말들은 입 안에서 맴돌다가 삼켜졌다. 눈물이 나오더라도 말을 할걸. 쓸데없는 자책만 남았다. 그래 놓고 봉안당에서 마지막으로 절을 할 때도 마지막 인사로 겨우 '외할머니 안녕히 가세요'라고밖에 말하지 못했다. 후회도 소용없었다. 사람은 참 변하기 힘들다.  


그 시절 시골 할머니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우리 외할머니는 정말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계를 위해 어머니가 외지로 일을 하러 가서, 고작 일곱살이었던 외할머니가 어린 남동생을 위해 밥을 하고 집을 돌봤다고 한다. 결혼 이후 시집와서 자식 일곱 명을 낳고, 방앗간 일에 농사에 시집살이를 하며 집안일까지 고된 삶이었을 것이다. 본인은 밤에 잠이 없는 사람이라, 일하느라 밤을 새우는 건 쉬운데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며 웃던 외할머니. 밤에 늦게까지 일을 하면 아침에 일어나는 게 당연히 힘든 건데..


사실 내 멋대로 외할머니의 삶을 속상해하는 것은 외할머니께 큰 실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외할머니의 삶을 낱낱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무탈하게 장성한 다섯 명의 아들과 딸을 둔 외할머니의 삶은 알알이 꽉 찬 충만한 삶이었을 수도 있다. 내 멋대로 외할머니의 삶을 속상해하는 건 할머니한테 미안한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입관식 때 그 붓기는 너무 심했다. 속상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외할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한 것만으로도 슬픈데, 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을 아니까 마음이 더 아팠다.


외할머니의 장례를 끝으로 나와 남편의 조부모님은 한 분도 남아 계시지 않다. 자연스레 우리 부모님들과의 남은 시간에도 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평소 무뚝뚝한 남편이 시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을 것이고, 그 배경을 이해하는 나는 기꺼이 아이들과 함께 여행에 동참했다.


외할머니 장례식 때, 이걸 계기로 우리 엄마가 남은 시간 동안은 조금 더 편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의 밭농사를 거들지 않겠다는 엄마의 선언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한 동안 쉬던 엄마는 주말에 야시장에서 김밥 싸는 일을 시작했다고, 일주일에 이틀만 잠깐씩 일하는 거라 괜찮다고, 일하는 게 재미있다는 안부를 전해 왔다. 엄마의 선언으로 아빠의 밭농사는 무산되었지만, 외할머니가 남겨둔 밭을 그냥 둘 수 없었는지, 밭에서 수확했다는 마늘, 양파, 감자를 택배로 부쳤다는 연락도 전해 왔다. 엄마의 삶은 엄마의 것.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 엄마에게 더 좋다고 하더라도, 내 기준을 강요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이제 일을 시작했다는 엄마에게 더 이상은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다음에 만나면 자주 물어볼 것이다. 엄마의 삶에서 좋았던 여러 순간들을. 나중에 이별할 때 슬픔은 어쩔 수 없어도 속상하지 않도록. 그리고 후회가 많이 남지 않도록, 시간을 내서 함께 추억을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작년에는 시골집 보름 살기를 엄마와 함께 했고, 올해는 강릉 보름 살기에 엄마를 초대했다.


그리고 바라건대, 나의 끝에서 나의 아이들이 속상하지 않도록, 나는 고생을 멀리 하려 노력 중이다. 나중에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엄마와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우리 엄마는 인생을 참 즐겁게 잘 지내셨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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