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우주만 한 이유가 다 있지

어른 어학연수 긴 여행의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by 따뜻한 스피커

2019년. 10.24. 떠나기 일주일 전


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주까지 드디어 공식적인 수업과 이것저것 강의 일정들을 마무리했고..


놀. 고. 있. 다!


유쾌한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동네 인기 피아노 학원 원장이다.

지금 같은 입시철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예중 예고 음대를 보내고... 그녀의 손을 거쳐간 제자들이

이 동네, 그리고 먼 동네까지 수두룩하다.






'나 놀. 고. 있. 어'

와우. 헛. 이런 기분이란... 생각보다... 무. 섭. 지. 않았다...

그동안 만남을 미루어두었던 지인들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도 가볍게 흥이 났다.

오후에 서둘러 돌아가야 할 학교나 강의실이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기분이란 이런 거구나.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다만 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트에서 장을 볼 때다.

덥석 집어 들었었던 군것질거리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1+1은 없는지 더 찾아본 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주머니 사정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히 나의 간을 잠시 작아지게는 했으나

나는 여전히 아직은.. 휴식이 즐겁다.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사버린 큼지막한 28인치 캐리어가 도착하는 순간부터 현실감이 확 몰려왔다.

그 캐리어를 거실 한편 잘 보이는 곳에

우뚝 세워두고 '전장에 함께 나갈 나의 무기여 안녕' 아침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결연히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다.


"늦가을 더운 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된 나는 마음에 쏙 드는 여름 모자를 반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저 캐리어는 내 작은 키에 육박하는 크기와 튼튼함을 자랑한다.


흡사 전투를 준비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혼자' 떠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 처음 나에게만 집중하는 대단히 이기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려는 중이다.

나는 90일이라는 시간, 생애 처음 나 홀로 해외여행 그것도 기숙사형 어학연수를

떠난다.


2주 후면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는 비행기에 이미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앗 그렇게 생각하니까 머리가 쮸볏!

그 비행기에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밥도 안 해도 되고 일도 안 해도 된다.

어학원에서 시간 되면 척척 나오는 밥을 먹으며 오직 좋아하는(나는 영어공부가 취미생활이다. 몸을 안 움직이고 하는 언어 공부가 재밌다) 영어공부를 하면서 마음에 드는 카페를 골라서 꼼짝 않고 앉아 몇 시간이라도 있을테다.

쫓기는 것 하나 없이.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만 하면서.'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머리가 쮸볏 설지도 모른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여긴 어디?? 난 누구????"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난 왜 이 나이에 누가 시켜도 못할 사서 고생 프로젝트를 시작한 걸까?

패키지여행이나 잠깐 다녀오고 말 것을.

(실제로 떠나기 전 남편에게 "나 미친 거 아냐? 취소할까?" 두어 번 정도 말한 적이 있었다. 대답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20대도 30대도 아니면서

영어도 잘 못하면서

해외여행을 가면 화장실 하나 갈 때도 들어가긴 하는데 나오면 어디서부터 걷던 중이었는지

방향도 못 찾아 잔뜩 긴장하면서

남편이 좀 멀리라도 떨어져 있다 싶으면

"아 좀 보이는 곳에 있으라고!"

괜히 불같이 화를 내던 방향치요 길치면서,

과연 나 40대 후반 아줌마, 혼자 정말 무사히 잘해 낼 수 있을까?

나는 끝없이 나를 의심하며 비행기 안에 그렇게 혼자 앉아있지 않을까?






지난주부터 백수가 되어 주위는 고요해졌는데

속은 무지 시끄럽다.


프리랜서는 불안성을 즐겨야 하는 직종이다. 그래서 쉬기가 더 어렵다.

무리할 때는 무리를 해주어야 일도 끊어지지 않고 들어온다.

기침감기에 걸려 수개월째 끊어지지 않는 기침으로 옆구리가 저려와도 웃으며 앞에 서야 했던

스피치 강사.


프리랜서 강사로 대안학교 교사로 쉬지 않고 지난 거의 10년간 몰입해서 일해왔다.

만약 이렇게 길-게 일을 안 하고 쉰다면 현장에서 잊힐게 뻔한 것이 이 업계의 불문율이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찾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찌하나.


오직 나를 치유하고 공부하고 읽고 쓰는 것을 해보겠다는 이기적인 셀프 프로젝트.

-결국 돈ㅈㄹ.. 하러 가는데- 돈값을 못하고 아무것도 얻어오지 못하면 어쩌지. 어찌 모은 돈인데....


다정히 병이고 외로움이 불치병인 내가

그곳에서 3박 4일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석 달을 보낼 수 있을까

수다가 그리운 긴긴 낮과 밤을 친한 친구 한 명도 없이 혼자 어찌 견딜까


40대 후반에 떠나는 나 혼자만의 긴 여행

나의 선택이었지만 두려움이 가득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걸고 이어간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예상이 안돼서, 길어서,

외로울까 봐,

더 불안하고

겁이 나는 중이다.


누가 묻는다.


근데 왜 떠나?


글쎄 이 모든 걱정보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낯선 경험을 향한 즐거움의 욕구가 힘이 더 셌다!라고할까.


아니면


나는 그간 너무 지쳤고 대안학교 교사로서 휴직을 선언할때.. 그 관련된 일과 사람들로 인해 많이 울었

쉼과 치유가 간절히 필요했다


정직하게 말할까.


기계처럼 강의를 이어가거나 하던 대로 살기에는 마음의 에너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몸담았던 학교 아이들이 보고 싶고 눈물이 났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어떡하지 마음도 조그맣게 움츠러들었다.

실연을 하고 왜 유학이나 이민을 가는지 알 것 같았다.


근데 그냥 노는 것은 못하겠어서

동남아시아 2개국 3개월 영어 어학연수를 택했고

그곳에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숙제하고

남는 시간은 책을 읽고

주말엔 혼자 여행을 할 것이다.(과연?)


때론 두고 온 감정을 다시 끌어오고,

때론 두고 오지 못한 감정들을 안고 울겠지.

그럴 땐 일기를 쓸 것이다.




피아노 원장인 유쾌한 그녀는 나의 길 떠나기 전 만나고 싶은 사람 중 '위시 미팅 리스트' 에 들었다.

격려와 응원이 필요한 이 순간에 그녀의 긍정의 밝은 에너지가 내게 힘이 되어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 나도 그녀의 눈물의 시간을 알고 있고 공감해준 나날이 있었기에

더욱 나에게 우호적일 것으로 예상도 되었다. 저금한 거 찾는 마음으로 갔다. 응원받으러.


역시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내가 왜 긴 여행을 떠나는지 깊고 어지러운 속도 모르면서

'좋겠다' '부럽다' '대단하네'라고만 하지 않았다.

가만히 나의 여행의 이유를 듣더니

"멋지다! 너무 기대된다! 그동안 맘고생 많았으니 떠나는 게 마땅하다!"

심지어 "다녀오면 더 기대된다! 다녀와서 진짜 유학도 가라! 도착하면 사진 보내라!"라고 말해주었다.

나의 도전 자체를 인정해주고 진실의 힘을 가득 실어서 기뻐해 주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인생을 여행같이 살 줄 안다. 여행은 로망이 아니고 '성장방식'임을 알고 있는 그녀와는 그래서 마음이 잘 통한다.


응원에 덧붙여 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신이 여는 동네 음악회에 참여해서 토크쇼 한 꼭지를

진행해달라는 말도 했다.

엇 이렇게 계약서도 없이 하하하

그저 즐거운 기대 한 스푼으로

두려움은 어느새 조금 더 멀리 도망가고 있음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다 저마다 설명할 수 없는 우주만 한 슬픔이 있고 긴 여행을 떠날 이유가 있다!

나는 이제 이유가 충전되었다! 가자!





이제야 다시 용기내어 꺼내 쓰는 여행기입니다. 혼자만의 긴 여행이어서 가능했던 많은 일들이 있었고 위험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제한없이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해서 누렸던 충만한 감정과 기분,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더 멀리 멀리 날아가기전에 '90일간의 나홀로 어학연수매거진'을 시작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