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몰랐던 힘을 배우고,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두려움과 마주하는 것이다.
-린다 우튼-
엄마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대학은 무조건 한국으로 갈 거라고, 딸 한 번 믿어보라고 큰소리 뻥뻥 치며 혼자 귀국해 놓고, 주말이면 바람 쐰다며 자꾸만 밖으로 돌던 나를 볼 때.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도, 잔소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나의 일탈을 바라봤을까? 나라면, 엄마처럼 그렇게 기다려줄 수 있었을까?
★고3이 무슨 뜬금없이 팬클럽 회장이냐고요?
전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잠시 1편 먼저 살펴보고 오셔도 좋습니다 :)
https://brunch.co.kr/@sunny-room/8
타깃은 정해졌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들을 만나야 한다. 나는 고3이고, 시험은 코앞으로 다가왔고, 하지만 나는 팬클럽 회장이 되고 싶다. 인터넷도 없었고, pc통신도 안 하던 그때의 내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콘서트 정보를 얻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레드 플러스>가 대학로 소극장에서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접수했다. 그것도 바로 이번 주말에. 됐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콘서트를 보러 가기로 한다. 그런데 아뿔싸! 콘서트는 공짜가 아니잖아. 그동안의 주말 외출로 인해 내 주머니는 이미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상태. 어쩌지?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그럴 순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물러날 곳은 없다. 엄마와의 정면 승부다!
그즈음 엄마는 혼자 귀국해 공부한다고 고생하는 딸의 응원차 잠시 중국에서 돌아와 나와 함께 지내고 계셨다. 어쩌면 나의 잦은 주말 외출이 걱정된 막내 이모가 엄마께 살짝 귀띔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일탈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일주일을 함께 지내는 동안 엄마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그사이 엄마는 딸에게 필요한 문제집과 학원을 알아보고, 대입에 필요한 여러 서류를 챙기고, 그 외에도 혼자 지낼 딸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것들을 준비해 주기 위해 수험생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셨다. 당시 내가 준비 중인 대입전형은 해외에 장기 체류 후 귀국한 자녀들을 위한 특례입학시험이었다. 지원 예정인 대학교 별로 입학 전형이 달라 그에 맞는 서류를 일일이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때는 90년대 말.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대입에 필요한 나의 초, 중, 고 재학 및 졸업 증명서를 떼기 위해서는 엄마가 직접 내가 다녔던 7개 학교에 발품을 팔아야 하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것도 한국, 일본, 중국의 여러 도시를 오가며. 그렇게 홍길동처럼 3개국을 오가며 마련한 서류를 다시 딸이 지원할 대학교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접수해야 비로소 엄마의 <딸내미 한국으로 대학 보내기, 서류 접수 편>은 끝이 났다. 엄만 그걸 다 어떻게 해냈을까.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인터넷도 없고, 국제전화도 비쌌던 그 시기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내 뒷바라지하느라 신고 다니던 구두 뒤축이 다 닳아 없어졌다고 한다. 나는 몰랐다. 엄마의 발품 덕분에 내가 책상에 앉아 편하게 공부만 하면 됐었다는 것을.
철없는 딸은 발이 퉁퉁 붓도록 종일 애쓰고 돌아온 엄마께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 저 콘서트 다녀오게 용돈 좀 주세요. 저 진짜 이 공연 가야 해요. 공부하느라 스트레스받는데 주말에 이 정도는 다녀와도 되잖아요?"
허 참, 고놈 보소. 뭐가 그리 당당했니, 그때의 나야. 지금 네 딸이 너한테 저런다고 생각해 봐. 너는 뭐라고 할 것 같아? 너 지난번에 보니까 너네 큰딸 NCT 드림 오빠들 콘서트 티켓팅 도와주면서 엄청 구시렁거리더라. "말도 안 돼. 이렇게 비싼 걸 보러 간다고? 그것도 시험 직전에?"
나라면 시험이 코앞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분명 싫은 소리를 하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시더니 "그래, 알겠어." 조용히 용돈을 꺼내 내게 쥐어주셨다. 엄마의 너무나도 심플한 반응에 잠시 멈칫했지만,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 이제 총알도 손에 쥐었겠다. 방아쇠를 당기러 나는야 간다, 대학로로 간다. 대학로 라이브 1관이었던가? 철제문을 열고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다시 작은 문이 나오고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면 깜깜한 객석 앞으로 작은 무대가 붙어있던 그곳. 두근두근, 콩닥콩닥. 오늘 내 심장은 아무래도 내 귀 옆으로 이사 왔나 보다.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크게 뛰지? 나 어디 아픈가?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희미했던 무대 조명들이 일제히 번쩍, 눈을 뜬다. 소극장 1열. 무대는 말 그대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두 손을 모아 쥐던 그 순간. "와!!!!!" 하는 객석의 탄성을 신호탄으로 세 명의 실루엣이 무대 위를 채운다. 몇 년 전, 코찔찔이 중학생 시절. 나의 첫 덕질의 추억 이승철 오빠를 직접 본다고 롯데월드 야외무대에 가서 몇 시간을 기다려 라이브 공연을 보던 그때와는 또 다른 희열. 왜냐하면 여기는 대학로 소극장이니까. 대학로의 어두컴컴한 지하 소극장에서, 난생처음 락밴드의 공연을 라이브로 보다니! "어머, 나 좀 멋진걸?"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이런 생각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무대 위의 가수에 반하고 그들을 보고 열광하는 꽤 쿨한 내 모습에 또 반하고. 그렇다, 나는 스무 살 고3 여름에 호환마마 보다 무섭다는 '중2병'을 앓고 있었나 보다. ( 약은 약사에게, 중2병은 몽둥이에…..)
콘서트에서 몇 곡을 들었는지, 어떤 곡에 제일 열광했는지는 아쉽게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사실 지금부터다. 콘서트가 끝나고 잠시 객석에 앉아 공연의 여운을 느끼느라 멍해있던 내게 레드플러스의 매니저라고 자신을 소개한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다가왔다. 내 또래의 예쁘장한 소녀와 함께. "레드플러스 팬이시죠? 저랑 같이 팬클럽 맡아보지 않으실래요?" 당시 유행하던 깻잎머리를 왁스로 정갈하게 빗어 붙인 까무잡잡한 피부와 오뚝한 콧날이 매력적이던 소녀는 작은 입술로 조곤조곤 이렇게 말했다. 꿈인가? 그렇구나, 이런 꿈을 꿀만큼 내가 간절했구나. 그랬구나. "저는 ***의 형이자 매니저를 맡고 있는 ***라고 합니다. 공연을 보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눈여겨봤어요. 우리가 곧 팬클럽을 개설할 건데 여기 이 친구랑 같이 맡아서 끌어가 줬으면 좋겠어요." 이번엔 소녀의 옆에 서있던 아저씨가 다시 비슷한 얘기를 반복한다. 그제야 자신이 보컬의 친형이자 매니저라고 밝힌 그 수상한(?) 아저씨를 찬찬히 살펴봤다. 과연, 생김새와 체형이 방금 전 무대 위에서 노래하던 메인 보컬과 비슷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이 무슨 청춘 캔디 드라마 뺨치는 극적인 전개란 말인가. '간절히 바라면 우주의 모든 기운이 나서서 돕는다'라고 했던가. 자기 계발서 <시크릿>도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말도 세상에 존재하기 훨씬 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네, 할게요!"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나만 끄덕이면 그렇게 원했던 팬클럽 회장의 자리가 내게 오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남겨진 만 원짜리 한 장을 만지작거렸다. 공부 안 하고 놀러 나가는 딸내미 배고플까 봐 뭐라도 사 먹으라고 엄마가 넉넉히 넣어주신 용돈. 반듯하게 접혀 내 바지 주머니에 담긴 그 만원을 부적처럼 손에 꽉 쥐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생각해 볼 시간을 주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원하던 일이었는데, 나는 왜 망설여졌을까. 왜 그들이 내민 손을 덥석 잡지 못했을까. "잠시 얘기 좀 할까?" 뜻밖에 어두운 낯빛으로 돌아온 내게 엄마가 대화를 제안했다. 올 것이 온 건가. 안 그래도 속 시끄러운데, 내일 하시죠 어머니!라고 할 순 없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방 안의 공기와 조용히 나를 기다리는 엄마의 눈빛이 나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따끔하게 혼날 거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엄마는 지금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차분히 물으셨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엄마와 아빠가 어떤 지원을 하고 있는지, 나 혼자 한국에 체류하며 공부하고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 얼만큼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셨다. 충격이었다. 나 좋자고 하는 공부에 이렇게 많은 부모님의 희생과 도움이 필요했다는 걸 왜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몰랐던 걸까, 모르고 싶었던 걸까.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감사의 마음은 멀리 밀어놓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만감이 교차하던 그때, 엄마가 내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항상 뜨거운 엄마의 손. 핫팩처럼 뜨거워서 배 아플 때 쓱쓱 몇 번 쓸어주면 노곤노곤 긴장도 아픔도 녹아내리게 했던 그 손. "두 달이야. 9월, 10월 두 달만 고생하면 돼. 두 달을 어떻게 보낼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 엄마의 뜨거운 손이 내 손을 꼭 쥐는 게 느껴졌다. 말로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크고 간절한 마음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고3이지만 팬클럽 회장은 되고 싶었던 내 안의 하이드는 그렇게 엄마의 작고 뜨거운 손바닥이 데려온 호리병 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온 지킬은 그 후로 단 한번도 주말의 대학로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다시 찾은 진짜 목표를 향해 정말 '미친듯이' 몰입했다. 덕후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꽂히면 앞만 보고 간다. 노 유턴, 노 빠꾸 앤 네버 스탑.
"넌 꼭 그렇게 혼자 다 결정하고 통보하더라."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기어코 하고야 마는 내가 맘대로 내 갈 길을 결정할 때마다 엄마가 종종 하시던 말씀이다. 그 말의 숨겨진 의미는 "그래, 엄마는 너를 믿어."임을 이제는 안다. 여전히 혼자 일 벌이기 좋아하고, 뭐 하는지는 모르지만 늘 바쁜 딸을 엄마는 이렇게 표현하신다. '조용하지만 마음속에 용광로를 품고 사는 우리 딸'이라고. 어쩌면 엄마는 아주 오래전, 걷기 한참 전에 말부터 배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또박또박 전하던 어린 딸을 마주했던 그때부터 딸의 마음속 숨겨둔 하이드를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볼도 볼록, 배도 불룩, 아무리 봐도 무용과는 어울리지 않던 똥똥이 아홉 살 시절, 기어코 학교 무용반에 들어가 전신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무용을 하겠다고 우겼을 때도 엄마는 조용히 내 머리를 올려주고, 토슈즈를 신겨줬나 보다. ( 비록 그 시절 무용반 사진은 아직까지도 나의 흑역사로 남아있지만 후회는 없다.) 그래서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고등학교 연극반에 들어가 매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야자 대신 연극 연습을 하고 돌아온 딸을 위해 나물 무침, 생선 구이, 구수한 찌개 보글보글 끓여 한 상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나 보다. 대학 졸업 후, 힘들게 합격한 공채 자리를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3개월 만에 박차고 나왔다는 소식을 대만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로 통보했을 때도 엄마는 긴말 대신 그저 한 마디. "넌 꼭 다 정해놓고 그러더라."
마음이 시키는 일을 만나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되고, 부딪혀서 깨지고 아파봐야 정신 번쩍 차리고 제 갈길 가는 딸임을 엄마는 애초에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굳이 길게 잔소리할 필요 없고, 그저 믿고 기다려주면 알아서 옳은 결정을 하리라는 엄마의 믿음. 그 믿음이 늘 나를 바로 걷게 했다. 딴 길로 새려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했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가도 금세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뛰게 했다. 아이들을 낳아서 이만큼 키워보니 알겠다. 자식을 기다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은 꾹꾹 접어 넣어두고 잔소리 대신 뜨끈한 밥 한 끼, 꾸지람 대신 편안한 이부자리 한 번 더 봐주는 것이 엄마가 짊어진 자식 사랑의 무게임을 나도 이제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아, 혹시라도 팬클럽 사건이 열린 결말이라 답답하실 분들을 위해 짧게 결론만 밝히자면, 나는 팬클럽 회장이 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원하던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신나는 대학생활을 즐기다 팬클럽 회장이 되는 대신 노래 동아리 회장을 만나 뜨겁게 연애하고 결혼해 지금까지 같은 집에서 잘 살고 있다. 아빠 닮아 키 크고 순수하고, 엄마 닮아 덕질의 즐거움을 아는 두 딸과 함께. 이 정도면 나름 해피엔딩 아닌가? 나는 종종 열일곱 살 큰 딸을 보며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시절 엄마를 거울삼아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나는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잘 감당하고 있을까. 오래전, 갈팡질팡 흔들리던 딸을 다그치고 야단치는 대신 뜨거운 손으로 꼭 잡아준 사랑하는 나의 엄마처럼. 나도 기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엄마이고 싶다.
추신.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하고픈 분이 한 분 더 계시다. 그분은 바로 나의 막내, 아니 꼬마 이모. 고3 조카를 위해 고2 아들 책상과 침대를 기꺼이 내어주신 대인배 우리 이모. (이모, 전 그렇게 까지는 못할 것 같아요.) 공부하는 조카딸 잘 먹어야 한다고 삼시세끼 구첩반상 따끈하게 지어주신 요리왕 우리 이모. 이모 밥이 너무 맛있어서 신나게 먹고, 학교 다녀온 동생들 야식 먹을 때 같이 껴서 또 열심히 먹다 10킬로가 쪄버린 조카를 위해 대학교 합격 선물로 <풀무원 다이어트> 풀패키지를 통 크게 쏘신 리치리치 이모. 제 글 다 읽고, 라이킷 꼬박꼬박 눌러주시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모,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