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을 핑계로 배운 이별의 기술
시간이 지나면 비어 있는 것이 가장 큰 자산이 된다
-제프 고인스-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책 『단어 수집가』의 주인공 제롬은 낱말을 모으는 단어 수집가다. 어느 날 제롬은 공들여 모은 낱말들을 수레 가득 싣고 산으로 올라가 미련없이 모두 날려 보낸다. 바람에 실려 날아간 단어들은 이제 모두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제롬은 행복했다.
어린 시절, 나는 꽤 열정적인 ‘종이 인형 수집가’였다. 매일 유치원 끝나면 문방구에 들러 메리와 하니, 샛별 공주 같은 수많은 종이 인형들을 신중히 평가했다. 국적도, 패션 감각도 다 다른 인형들 중 나의 깐깐한 심사를 통과한 인형만이 컬렉션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합격한 인형을 손에 쥐고 당당히
100원을 건네는 그 순간만큼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인형을 손에 넣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가위질과 테이핑 작업이라는 ‘성스러운 의식’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어깨 걸이부터 목 테이핑까지 철저한 기준을 지키며, 종이 인형을 ‘결전의 장’에 투입했다. 어쩌면 그래서인지, 놀았던 기억보다 오렸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오려낸 종이 인형들은 대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예쁜 엽서 수집가'이자 라디오 애청자였다. 늦은 밤, 청취자의 사연을 조곤조곤 읽어주고 그에 맞는 음악까지 소개하는 라디오 DJ를 동경했다. 어느 날, 애청 프로그램에서 1일 청취자 DJ를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것은 DJ가 되어보라고 하늘이 내게 주신 절호의 기회. 한치의 망설임 없이 몇 년을 공들여 모은 엽서 백 여장을 이고 지고 학교에 갔다.
"얘들아, 나 DJ 해야 해! 도와주라!"
착하고 성실한 나의 친구들은 저마다 솜씨를 뽐내며 나를 DJ로 뽑아줘야 하는 백가지 이유로 엽서를 채웠다. 정성스레 꾸며진 엽서는 기차처럼 리본으로 연결해 튼튼한 상자에 담아 방송국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엽서 컬렉션은 우리에게 기대와 실망만 남긴채 영영 자취를 감췄다. 그 후로 나는 아무리 예쁜 엽서를 봐도 사지 않는다.
공들였던 시간이 허무하기로는 끊어진 인연만 한 게 있으랴. 전학 간 짝꿍, 중학교 때 첫사랑, 고등학교 단짝 친구, 이등병 때 헤어진 대학 시절 남자친구까지. 시간이 흘러 변해버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잊힌 청춘의 이름이야 그렇다 치자.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관계임에도 소리 없이 시작된 균열을 메우지 못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실패한 어른의 관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공들여 오리고, 붙이고, 모았던 종이 인형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듯이 지나 간 인연 또한 세월 가고 잊히면 그만인 걸까. 그렇게 각별했던 우리였는데. 그때 내가 감정 표현에 좀 더 신중했더라면, 냉정하게 등 돌리기 전에 한 번 더 손 내밀었다면, 그랬다면 그 인연들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까. 소중한 관계들을 나의 부족함이나 이기심 때문에 망가뜨려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관계에도 유효기간이 있어요.
끝난 관계는 폐기하세요.
-밀라논나-
100만 할머니 유튜버 밀라논나는 인간관계의 변화가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더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우정에서 손을 떼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자는 것.
우리가 무언가를 정성스레 보듬고, 모으는 이유는 어쩌면 언젠가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제롬이 날려보낸 낱말카드처럼. 유효기간 만료된 추억도, 인연도 잘 떠나보내는 일이 오래 간직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걸 배운다. 엉터리 수집가였지만 덕분에 깨달은 이별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