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동안 3번의 이직. 저처럼 미로를 헤맨 분 있으신가요?
주말 아침이면 청소를 한다. 어릴 때보다는 많이 깔끔해진 편(?)이라, 대청소를 매주 하기보다는 더러워진 부분 부분을 닦고 치운다. 하지만 가끔, 누가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지 모를 엉망진창의 옷장 서랍을 마주할 때가 있다.
한숨 한번 쉬어주고 일단 서랍을 꺼내어 뒤집는다. 가로로 접힌 옷, 세로로 접힌 옷, 찌그러진 표정의 옷... 겨울옷, 가을옷. 옷장 서랍마저 P스럽다. 바닥 위의 작은 무덤을 보며 한숨 푹푹 쉬게 되지만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알록달록 정돈된 한 폭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음, 올여름엔 노란색 티셔츠 한벌이 더 있으면 좋겠군.
퇴사 후에 본격적으로 딴짓(?)을 하기 위해 꼭 해두어야 하는 것. 바로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것이다. 회사 소속되어 있는 동안 해두어야 나중에 흐린 기억을 붙잡으며 받는 고통을 덜어 낼 수 있다. 프로 이직러로서 잘 그렇게 해왔는데... 이번만큼은 바로 회사에 지원할 마음이 없어서인지 영 내키지 않는다. 그냥 한 일을 쭉-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방향성을 가지고 정리를 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커리어 정체 구간에 막힌 마케터에게 추천합니다.
'이거 내 이야기인가?' 어느 강의에 소개 글을 보고선 마음 한편이'덜컹' 한다. 마케팅을 계속해야 하나, 어디 샛길로 빠지면 좋을까, 하고 내내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이런 제가 '정체 구간'에 막혀버린 건가요? 아무래도 커리어도 계절의 변화를 위해 옷장 정리를 해야 하는 시즌이 온 것 같다. 포트폴리오는 제쳐두고, 지난 회사 생활을 하나하나씩 꺼내어 보기로 한다.
시작은 대학교에 찾아온 한 선배의 강연이었다. 후배를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찾아오신 선배는 코카콜라 스프라이트 샤워 캠페인을 운영했고, 그 과정을 프레젠테이션해주셨다. 말도 안 돼! 우리 학교에서 저렇게나 큰 캠페인을 담당하는 선배림이 있다고? 강연대를 내려오시자마자 찾아가서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나는 해당 회사에 취업하게 된다. 물론 정식 면접을 거쳐서.
그러나 대형 캠페인을 꿈꾸었던, 서울에서 살지도 않으면서 친구 집 주소를 거주지로 쓰고 지원했던 귀여운 신입. 부산에서 씩씩하게 가방 메고 올라온 사회 초년생의 마음은 9개월 만에 무너졌다.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는데,
1) 글로벌이나 대기업과 함께하는 캠페인의 기획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었다. 행사의 큰 그림은 모두 이미 본사에서 다 만들어지고, 그 컨셉에 맞추어 사람들의 많은 참여를 유도할 행사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동선을 짜는 운영의 일이 메인이었다. 물론 이는 팀별/연차별 차이가 있다. 내가 속한 팀은 주로 '운영' 위주의 프로젝트가 많았다. 더 나아가, 가끔 기획의 일을 맡아도 내가 생각보다 페스티벌이나 행사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퍼런스를 찾는 일이 즐겁지 않았고, 고객에게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2) 오프라인 행사에 필요한 꼼꼼함을 갖추지 못했다. 아니, 노력이 부족했다. 오프라인 행사는 말 그대로 '라이브'다. 한 번의 실수를 되돌리기 어려울뿐더러 행사 전체의 성패를 좌우한다. 막내인 내가 준비물을 챙기거나 사이즈/개수를 파악해야 하는데 크로스 체크를 해도 마음부터 불안 불안했다. 정보 하나를 잘못 파악해서 실수한 것을 두고 며칠을 밤잠 설치며 괴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 업에 적성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순간이었다.
3) 나의 생체 시간과 달랐던 업무 문화. '회사'라는 조직에서 처음 일을 해보아서 '생산성' '효율성'이라는 개념조차 모를 때였다. 단지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왜 다들 오전에 일을 안 하지? 오전부터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얼른 시작해야 야근을 안 할 텐데!' 클라이언트의 스케줄에 맞추어 대응하는 대행 업무의 특성도 있고, 회사 문화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지각을 크게 터치하지 않고 점심을 먹고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나는 하루에 잠을 7~8시간 꼬박 자고, 저녁보다 아침에 머리가 도는 사람이다. 회사 문화를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이곳은 어렵겠다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얻은 것,
글로벌 기업에서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내부 컨퍼런스를 열었고, 행사 운영을 담당하게 되어 약 2박 3일간 행사를 진행했다. 1박 60만 원의 서울 중심에 위치한 5성급 호텔. 엄청난 분위기와 맛있는 뷔페, 타이틀을 떼고 봐도 멋진 분위기를 풍기는 글로벌 기업의 구성원들. 내게 엘리베이터를 열어주며 방긋 웃던 그 나이스함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나는 강렬히 깨달았다. 나는 이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행사에 그들과 함께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항상 과장님과 원 팀으로 움직이다가 어쩌다 혼자서 행사 담당자분들을 만나 행사 브리프를 하게 되었는데, 대표로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행사 동선을 설명해 주는 단순한 일이었는데 그들이 묻고, 내가 답하며 일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에 짜릿함을 느꼈다. '아, 나는 이런 일에서 존재를 느끼는구나'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이 중심인 조직에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외에도 동갑내기 동료를 만나, 지금은 직장인 밴드를 함께하며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행사 운영 경험도 당시에는 '괴롭다, 이해 안 된다. 성격 나빠져서 도저히 못 다니겠다' 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지나고 보니 애틋하다. 보람차고 즐거운 순간도 분명 있었다. 활동적인 성격이고 사람을 좋아하니 오프라인 행사일이 잘 맞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커리어에서는 훨씬 다차원적인 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입사한 곳은 국내 최대 유저 수를 보유한 뷰티 커뮤니티 플랫폼. 첫 번째 회사에서 업무 커뮤니케이션의 즐거움을 맛본 나는 광고 사업부의 B2B 세일즈 매니저 직무로 입사하게 된다. 정규직 전환형 인턴 3개월로 일을 시작했는데, 앞서 3명이 연속으로 전환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우, 쉬운 일은 아니겠군' 싶었다. 하지만!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 전환이었다. 다행히 모두 나를 좋아해 주셨고, 퍼포먼스도 좋았다.
1) 유연하고 빠른 대응이 가능한 온라인이 잘 맞았다. 주로 메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인바운드로 고객 문의를 대응하고 광고 매출로 연결하는 일이었는데, 빠르고 적극적인 업무 처리 능력이 나의 강점이었다.
하루에 20~30건의 문의를 대응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더 퍼포먼스를 잘 만들 수 있을까,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읽기 편한, 짜임새 있는 메일을 작성하고 포맷을 만들어 나갔다. 돈과 관련된 민감한 커뮤니케이션에서 리스크가 발생하지 않게 두 번, 세 번 다듬었다. 대량 영업 이메일 발송도 더 효율적이고 예쁘게 발송할 수 있는 서비스로 변경을 리드하기도 했다. "PPT 만드는 것보다 이메일 쓰는 게 더 재밌어요!"라고 사수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 수십 번의 'control + enter'(메일 발송하기의 단축키)를 누르는 것이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아무튼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나 보다.
2) 업무 합이 잘 맞는 사수와의 만남 사수는 꼼꼼함과 신중함, 적당한 완벽주의를 가진, 성과 중심의 지도자형 ENTJ였다. 나는 열심히는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과 성격상 목표 지향적이지 못한 면이 있는데, 그런 나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어 일하면서도 좋은 자극을 받았다. 내가 이런 유형의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시너지가 나는구나, 깨달아서 팀원의 구성을 볼 때 하나의 기준이 생길 수 있었다.
3) 매출 성장의 즐거움 해당 분야에서는 굳이 외부 영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기에 문의를 응대하는 것만으로 목표하는 매출을 달성해 왔다. 광고 사업의 최고 매출을 달성하여 사내 콘테스트에서 '베스트 퍼포먼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뷰티 카테고리가 주요한 고객사였다가, 새로운 광고 상품을 기획해보기도 하고 패션과 식음료 등 새로운 카테고리의 고객사를 담당하며 포트폴리오를 넓혀갔다.
이렇게, 두 번째 나름 성공적인 이직을 맛보았다. 너무나도 운이 좋게 결이 잘맞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고, 팀원들도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다. 업무 퍼포먼스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나는 1년 7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하게 된다. 도대체 왜?
2편에서 계속...
퇴사하고 뭐 할까? 매거진은 스타트업, 마케팅 에이전시 등을 거친 6년 차 마케터 '영선'이 처음으로 갭모먼트를 가지며 하게 되는 생각과 일상을 기록하는 시리즈입니다. 요즘 같은 대퇴사의 시대에 저의 갭모먼트는 남들과 같을까요? 혹은 나만의 풍경을 그려가게 될까요? 일기처럼 하루에 1개씩 쓰는 것이 목표랍니다. 궁금하시다면 구독하고 지켜봐 주세요!
Insta @youngsun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