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스페인 여행기 2
1월 4일 여행 기록
1. 안풀리면 어때? 그게 인생인데
시차 때문인지 매일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지속되고 있다. 견딜 수 없이 졸려 8시 정도에 잠들고 열한시 경 깼다가 다시 잠들고 새벽 5시면 깬다. 한국은 이 시간이 훤한 대낮이라 지인들과 밀린 연락을 주고받는다.
오늘은 그나마 잠을 좀 자서 7시에 일어난다. 스페인에 온 후로 톨레도에서 빼고 날씨가 계속 흐려서 아침에 일어나면 마치 밤 같이 깜깜하다. 해도 8시가 넘어서야 뜬다. 아침을 먹고 다 준비해서 8시에 나섰는데 밖은 깜깜하고 비까지 흩날리며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민박 직원분이 1월은 스페인의 우기에 해당해서 날씨가 안좋다는 말이 맞았다. 겨울 스페인이 따뜻해서 여행하기 좋은 것 아니었냐니까 그건 2월 이야기란다. 어째서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몰랐던 걸까.
어쨌든 오늘은 영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스페인에 온 후로 왜 이리 날씨운이 따라주지 않는 걸까. 게다가 체력도 영 별로다. 그 두 가지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지하철을 타고 몽클로아(3,6호선 moncloa)역에서 내려 블로그에서 본 데로 던킨 도넛 옆에서 세고비아로 가는 버스표를 끊어서 한참 기다린 후 9시 15분 버스를 탔다. 그저께 톨레도에 갈 때처럼 가는 길에 날씨가 좋아지기를 바랐지만 반대로 비는 점점 더 쏟아졌다. 도착할 때쯤 되니 거의 소나기 수준으로 많이 왔다.
설상가상으로 톨레도에서 우연히 만난 신혼 부부가 세고비아의 알카사르성이 공사중이라서 사진도 안나온다도 해서 안그래도 반쯤 김이 샌 상태였다. 화가 치솟았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을 우리는 "운" 이라고 부른다. 노력이나 의지,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는 영역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우리는 "운이 없다" 고 말한다. 그 말의 할 때의 기분은 상당히 불쾌하고 화가 난다. 사실 알고보면 이 세상 많은 일에 운의 영역은 꽤 많이 작용하는데 마치 자신이 '뭘 해도 안되는 사람', 혹은 '불운의 아이콘'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표 끊고 기다리면서 인사하게 된 경상도 여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알카사르성 공사라 성도 다 안보이고 공사 때문에 사진도 파란색 구조물이 안보이게 찍기 힘들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하니 3개월째 여행중이라는 이 여자분들 중 한 분이 그야말로 쿨하게 말한다. "그럼 그 파란 거 다 보이게 찍으면 되지 뭐"
그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랜 여행으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의 마음 관리 노하우를 알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여행 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이런 낙관적이고 느슨한 태도는 필요하다. 계획대로 착착 잘 풀릴 때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꼬여서 돌아가는 듯할 때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뜻인가.
2. 흐린 날씨도 감출 수 없는 수도교의 위엄
버스에서 내려 수도교 방향으로 걸어간다. 이 방향이 맞나 긴가민가 싶은데 벌써 저편에 조그맣게 수도교가 보인다
이렇게 보니 그냥 작은 다리 같지만 엄청 멀리서 찍은 사진임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다리 아래 사람이 매우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막상 수도교 앞에 가면 그 엄청난 크기와 당당함에 정신을 놓고 한참 보게 된다. 로마인이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만들었다는 이 다리는 토목 공학 기술의 우수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시멘트 없이, 어떤 접착제도 없이 오직 화강암 블록으로만 만든 이 다리는 아치 꼭대기에서 누르는 종석의 힘에 의해 연결된다고 한다. 어쩌면 2000년 전 인간이 지금 우리보다 더 뛰어난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그 공사에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피땀이 동원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대니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허연 하늘빛 아래의 수도교는 영 돋보이지 않는다. 많은 여행객들이 후기에 수도교에선 어떻게 찍어도 화보가 되니 인생 사진을 남기라고들 하는데 영 글렀다. 하지만 사진 꼴은 저래도 실제로 보면 초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실물만이 줄 수 있는 당당한 아우라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결론은 비가 와도 수도교는 멋지고 좋았다.
3. 대성당과 골목길
비는 계속 내려 우산을 쓰고 구글 지도를 따라 조금 걸어가니 대성당이 보인다. 비가 내리니 우산에 카메라에 여간 거추장스러운게 아니다. 카메라 렌즈에 물이 묻을까봐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꿋꿋이 사진을 찍는다.
대성당을 나오니 기념품 가게들 옆으로 아기자기하고 조용한 골목길이 보인다. 관광객들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가본다. 사진 꼴은 저래도 골목길은 비가 와서 더 운치가 있고 고요했다. 작고 아기자기했고 돌로 된 바닥이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좀 걷다보니 저 작은 골목에도 작은 기념품 가게, 카페, 레스토랑 등 있을 건 다 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코치니요 아사도(세고비아 명물 새끼 돼지 요리)를
가리키며 혼자 먹을 수 있게 적은 양도 되냐고 하니 된다 한다. 혼자라서 포기하고 있었던 코치니요 아사도를 먹었다. 비록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서 보던 완전체 새끼돼지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실제로 보면 너무 마음 아파서 못 먹을 것 같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백숙 맛이라는 사람들의 표현이 맞았다. 생각보다 느끼하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는다. 바삭한 식감과 부드러운 속이 독특하고 맛있지만 먹다보니 느끼해서 주문한 커피를 계속 들이키게 된다. 하지만 결국 느끼해서 반 가까이 남기고 일어선다.
시간이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알카사르하나 빼고 모든 일정을 다 클리어했다. 알카사르는 조금만 걸어가니 나온다. 하지만 보자마자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파란 공사 구조물이 성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이건 그냥 불운이다. 운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 아놔...어쨌든 저 파란 걸 피해서 몇 장 찍어보지만 소용없었다.
내부에 들어가지도 않고 쓰린 속을 달래며 금방 돌아섰다. 알카사르에서 버스 터미널까지는 꽤 걸어야 했다. 한참을 걸어서 터미널에 오니 1시 20분밖에 안되었다. 왕복표의 돌아가기로 한 시간은 2시 35분인데 1시 35분 차가 있다. 직원에게 바꿔줄 수 있냐니까 쿨하게바꿔준다.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이제야 해가 난다. 떠나려니까 이건 뭐지.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오려는 걸 참는다. 그래도 괜찮아 톨레도에서 날씨 좋았잖아. 아놔...
마드리드에 도착하니 3시 가까운 시각. 숙소에 가서 침대에 누워 좀 쉬다가 어제 못 본 프라도 미술관 2층을 보기 위해 다시 나선다. 6-8시 사이는 공짜라 해서 솔광장 좀 돌아다니다가 6시 좀 넘는 시간에 도착했는데 웬걸, 사람이 무시무시하게 많다. 미술관을 빙 둘러서 엄청난 인파가 줄을 서 있다. 과연 이 인파가 다 들어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외국인들도 공짜는 좋은가보다. 한참을 기다려도 줄이 주는 속도는 더디다. 결국 40분을 길에서 허비한 후 겨우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 번 더 돈 내고 들어갈 걸 그랬다. 이래저래 실수만 반복하고 있다. 바보.
거의 8시 가까이까지 2층을 다 훑었다. 어제처럼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빨리 봤다. 가이드북과 미술관 안내서에서 봤던 대표작도 다 보았다. 굳이 찾을 필요 없이 사람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확실히 배경지식이 있는 그림과 모르는 그림은 그 감상의 질이 다르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 하나보다. 다음에 온다면 더 열심히, 꼼꼼히 공부하고 와야지.
프라도 미술관은 사진을 못찍게 한다. 루브르 미술관은 찍을 수 있었는데. 사진 하나 못 남겨온게 좀 안타깝다.
여기 사람들은 맘만 먹으면 이 어마어마한 그림들을 공짜로 하루에 두 시간씩 볼 수 있다. 이들이 누리는 문화적 인프라가 놀랍고 또 부럽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 오니 아홉시가 넘은 시각. 내일 또 짐을 싸서 세비아로 이동할 생각을 하니 아득하고 서글프다. 중간에 코르도바에 들러 반나절 관광하기로 계획한 것도 후회가 된다. 다 귀찮게 느껴져서. 아무튼 이날도 샤워하고 짐싸고 코르도바 코인락커와 맛집 알아보느라 열두시 가까이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여행은 고되다. 어찌 보면 일상보다도 훨씬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