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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26. 2018

오늘에서 유리된 이들

그 옆에 내일의 나

  그곳은 버려졌다는 말을 성으로 삼은 이들의 집성촌이었다.




  사실 건물 자체는 검박하게 지은 작은 아파트였고,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 그 정도면 나름대로 깔끔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 들어서는 기분은 어쩐지 좋지 않았다. 한창 낮 시간이었는데도 볕이 들지 않는데다가, 건물 앞에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 놓은 구멍가게는 웬만한 시골길에서 본 것보다 작고 허름했다. 일회용 샴푸나 자질구레한 과자 몇 개 외에는 무얼 파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구멍가게를 제외하면 근처에 이렇다할 가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 그곳이 버려졌다는 인상은 사람들에게서 받았다. 층계참에 모여 하릴없이 기운도 없이 앉아 있는 여자들의 시선, 대낮부터 잔뜩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남자들의 목소리.  어딜 보나 버림받은 이들의 냄새가 흥건했다. 떳떳하지 못한 시간을 거쳐온 사람, 구겨지듯 힘없이 떨쳐진 사람...


  여기는 명목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복지 차원에서 지어 놓은 아파트"였다. 그러나 인프라 하나 없는 곳, 도시로부터 차로도 한참 떨어진 외곽에 있는 곳이라 꼭 단호한 격리 조치라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굴속 같은 아파트를 다닥다닥 지어 의식주의 한 글자를 해결해 주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음침하고 어둡다 못해 조금 위험한 느낌마저 풍기는 것이, 비할 바는 못되겠으나 오버 좀 많이 보태서 이 구역의 구룡성채 같은 느낌이랄까.


이곳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우리는 찾아 왔다.


  그 아파트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몸 상태에는 늘 기복이 있지만 아무튼 좋다고 하긴 어렵다. 2년 전에 인도를 떠날 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꼭 또 보고 싶던 사람들이었다. 짐을 미리 싸 놓고 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인도에서 보는 마지막 태양 아래 이들을 만나러 갔더랬다. 에이즈로 눈이 멀고 몸이 마비되어 가는 남편 사즈, 마찬가지로 에이즈에 신음하면서도 남편을 살뜰히 챙기는 아내 굴랍 부부다. '사즈'는 숨결·멜로디라는 뜻, '굴랍'은 장미·연인의 눈물이라는 뜻으로, 그들을 떠올리며 만든 가명이다.


  오래 전 사즈는 운전기사였다. 집은 물론 자기 차도 있는 듬직한 사람이었고, 결혼하고부터는 아내 굴랍이 못 다 한 공부를 다시 시켜주고 싶어 더욱 열심히 일하는 바람직한 남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통사고가 났을 때 수혈을 잘못 받으면서 HIV 보균자가 되었다. 정식 병원이 아닌 '야매' 의료 센터로 실려간 탓이었다. 그 후로 회복 기간을 아무리 가져도 "어쩐지" 몸이 좋지 않아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부터 민간요법까지 다양한 세계를 지푸라기 잡듯 붙들고 벌인 사투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집안 기둥뿌리를 뽑아 먹도록 병원 신세를 진 후에 가까스로 HIV를 발견했다. 그러는 동안 사즈는 균이 시신경을 건드려 시력을 잃었고, 한쪽 다리 또한 마비되어 가고 있어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보균자가 된 아내 굴랍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굴랍 또한 요즘 몸이 점점 굳어가는 걸 느낀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몸 상태로 두 사람은 살고 있다.


  몇 년 동안 온갖 검사를 다 했다는데... 그 긴긴 시간 동안 왜 하필 HIV 검사는 쏙 빼먹었을까? 에이즈 창궐 지역이기도 한 인도에서 의사들이 그런 합리적 의심을 못 했을 리가 없다. 불과 며칠만 입원해도 이런 저런 명분을 붙여 온갖 검사를 받게 만들고, 그렇게 웬만한 사람 몇 달치 월급을 한 번에 쑥 받아가는 인도 병원을 나부터도 여러 곳 보았다. 그러니 사즈가 만난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 무얼 신봉했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하다.


  그 후로 사즈와 굴랍의 삶은 객관적 조건으로 보면 분명 불행의 연속이었다. 몸이 갈수록 굳어가는 것도, 셋방살이 이삿짐을 몇 번이나 싸며 집을 줄여가는 것도, 에이즈 진행을 저지하려고 먹는 약의 부작용으로 어쩌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쌍의 원앙처럼 서로를 보듬고 아껴주는 모습만은 변치 않았다.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학교의 꿈이 좌절된 후에도 방송통신 과정으로라도 굴랍이 공부를 계속했으면 해서 끝까지 애를 쓴 사즈의 마음도, 안 그래도 힘들 사즈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는, 그래서 항상 웃는다는 굴랍의 마음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2년 만에 보는, 아니 보지 못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사즈는 반가운 웃음을 짓는다. 하나 변한 게 없는 모습이다. 사즈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대신 굴랍의 가뜩이나 작은 몸은 장작개비처럼 푸석하게 말랐다. 그와중에도 사즈가 입고 있는 셔츠와 룽기(치마처럼 허리에 두르는 인도 남자 의상)는 여전히 깨끗하고 다림질도 잘 되어 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인상을 여실히 풍긴다.


  두 사람의 오른팔목에 똑같은 끈 팔찌가 탄탄하게 감겨 있는 것도 여전하다. 오래전 두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하고 있던 털실 팔찌와는 색깔만 비슷할 뿐 다른 것이다. 이따금씩 똑같은 붉은색 끈을 손목에 매며 두 사람은 서로의 인연을 재확인하는 의식을 갖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거친 삶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는 액막이 같은 것일까? 아마도 힌두교의 상징인 듯한 평범한 팔찌지만, 어떻든 정성스럽게 서로의 팔에 팔찌를 감는 두 사람을 상상하면 마음이 그나마 조금 편안해진다. 사실 마음 편히 앉아 있기가 쉽지 않았다. 앉아 있는 내내 바깥에서 술에 취한 사람 목소리가 고래고래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현지인 스태프와 앉아 있는 사즈. 그 말끔한 옷차림도, 손목에 감긴 털실 팔찌도 여전하다.


  여전한 것은 그뿐이 아니다. 깊은 물 같은 사즈의 목소리, 조악하지만 이사할 때마다 선반 한 켠에 고이 놓아 두는 조화 몇 송이, 손님이 올 때마다 자랑스럽게 또 수줍게 웃으며 보여주는 신혼 사진 액자, 힘든 삶에 눈을 내리깔다가도 다시 애써 고개를 들 때 보이는 굴랍의 미소... 버림받은 이들이 득시글대는 곳에 두고 오기엔 너무나 여린 뼈마디의 두 사람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쏟은 시간에 비해 이 재회는 너무 짧지만, 돌아가야 할 길이 먼 것은 둘째치더라도 오래 앉아 이웃의 시선을 끌어 봐야 이들에게 좋을 것이 없다. 짧은 환담을 나누다 이내 우리는 이들을 두고 나선다.




  차에 오르고 차가 서서히 움직이는데, 차창 바로 옆 놀라우리만큼 가까운 곳에 한 남자가 귀신처럼 부스스한 얼굴로 서 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를 휘둥그레 뜬 눈으로 멀거니 보고 있었다. 외국인이 많지 않은 골목에서 외국인 여자에게 어떤 시선이 꽂히는지 잘 안다. 일반적인 호기심이면 다행이고, 가끔 그보다 농도가 짙어 불쾌한 시선도 있지만 이 남자는 그저 멍해서 딱히 유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는 한국에서 하던 습관대로 고개를 주억거려 눈인사를 했다.


  그 순간 남자의 눈에 묘한 이채가 돌더니 반쯤 열려 있던 조수석 창문을 턱 잡았다. 운전석에는 남자 스태프가, 조수석에는 그 아내인 여자 스태프가 아이를 안고 앉아 있었다. 조수석 뒤에 앉아있던 나는 재빨리 그리고 조용히 손을 움직여 내 자리와 조수석 자리의 차 문부터 탁탁 잠갔다. 계산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남자는 쩌렁쩌렁 큰소리를 쳐댔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의 언어였다. 굳이 거친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는 몸짓을 보지 않더라도 그게 나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별로 호의적인 얘기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우리 스태프는 내가 대충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영어 단어를 섞어 말했다. 해서 아이들 하굣길 마중을 빨리 가야 하니 비키라고 말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만,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남자의 손은 차창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그 입에서 폭포수처럼 거침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와 내 굳은 어깨 위로 툭툭 떨어졌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몰라도 우리 스태프가 남자의 말에 제대로 대답해 주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는 내내 나는 무척이나 긴장이 되었다. 내 신변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차 문을 잠갔으니 여차하면 이대로 차 몰고 휭 나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불안했던 건 따로 있었다. 외국인인 나 때문에 우리 환자가 에이즈라는 게 까발려지면 어쩌지? 앞으로 우리 스태프들이 이곳을 방문하기 어려워지면 어쩌지?


  처음 단지로 들어설 때부터 내게 꽂히던 시선은 어느새 바늘처럼 사방에서 나를 콕콕 찔렀다. 하릴없이 앉아 있던 여자들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아까의 멍한 얼굴과는 다른, 흥미 있는 무언가를 찾은 얼굴들. 우리 스태프와 바깥에 배웅 나와 있던 굴랍까지 차분하게 그에게 뭐라 둘러대고, 상황이 일단락되자 우리는 재빨리 차를 몰아 나왔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로 눈을 부릅뜬 채 남자는 사이드 미러 속에서 나를 계속 쳐다보며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꼭 발가벗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슬림 여자들이 쓰는 것처럼 나도 뭔가 뒤집어써서 나를 가리고 싶었다. 선팅 되지 않은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다시 돌아보고, 입을 헤 벌리는 그 모든 과정은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 일상의 풍경이라 이제 더 이상은 불편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 모든 얼굴을 견디기 어려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에도 놀라는 법이니까.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우리로 치면 태극기 부대의 할아버지 정도 될까, 별로 대단하게 위협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속한 그룹은 위험했다. 나는 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서북 청년단 생각이 나는데, 느낌이나 극단성이 비슷하다. 종교와 민족을 야트막한 정치 술수에 도매금으로 넘겨 사람을 세뇌시키면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힌두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득달같이 달려들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밸런타인 데이 때문에 에이즈가 퍼지니까 막아야 된다고 하는 이들에게 무얼 바라겠는가.


  다만 그는 그렇게 열성 분자는 아니었고, 우리 스태프들과는 안면도 튼 사람이라 했다. 단지 술에 취해 앞뒤 구분이 안 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 환자에게도 스태프들에게도 큰 지장은 없을 것이라는 확언까지 듣고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마음이 가라앉고 나니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취한 그가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를 높이거나 흉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아찔했고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지금은 관광객일 뿐이지만 아무튼 한때는 NGO 파견 단원이었고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으니까 사실 나는 그들의 타깃이 맞기도 했다. 그 남자가 자기가 신봉하는 단체의 색깔을 조금 더 거칠고 선명하게 띤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우리는 인간이고 한 치 앞도 모르며 산다.


  다른 스태프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저녁까지 같이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 앉자 그제야 굳어진 얼굴 어딘가에서 흙먼지처럼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날 하루 동안 내게 날아든 모든 시선이 그제서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피부색만으로 배척당하는 건, 종교만으로 불안해진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아주 작은 차이만으로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내게 적대감을 품는다는 건 이런 기분인 것이다. 짧게 나를 스치고 떠난 공포의 파편만으로도 이렇게 작아지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집과는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공포 안에 있다는 생각이 덜컥 났다.


  예멘에서는 납치된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고, 아프간에서는 잊어버릴 만 하면 폭탄 테러 뉴스가 올라온다.시리아 동구타에서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얼굴에 핏자국과 눈물 자국이 뒤덮인 아이들의 사진이 몇 달 동안 전해져 온다. 내전이 7년차에 들어서 거의 끝나간다지만, 시리아 정부는 시리아인들에게 돌아오라고 메시지를 날린다지만, 시리아의 한 세대가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비극의 현재성을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 들 때가, 안전한 방에서 내게만 들려오는 나 자신의 숨소리가 무거울 때가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전쟁이란 위인전 속에나 나오는 사건이었고,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옛날" 사람들만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너무 먼발치 평온한 곳에서 깨달을 때마다 드는 기분이다. 다시 노트 한 권을 편다. 또다시 이런 밤, 홀로 대화하는 밤이다. 고독하되 인간 가운데 있는 밤, 하이데라바드의 밤이다.

  이 밤에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연대는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일기는 혼자 쓰는 글에 지나지 않기에. 이제 나는 어디서 누구와 부대끼며 이 공포와 싸울 수 있을까? 인도에서 살던 시절과는 다르다. 그때는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그러나 당장 주변의 기대와 수군거림, 통장 잔고, 사야 할 것들이 들어 있는 장바구니, 해야 할 일들이 쓰여 있는 플래너, 그밖에 여러 가지 현실적인 것들이 내 안에서 악머구리 끓듯 하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쁜 일상을 살면서 오늘 이 마음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뭔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는 있을까? 어떻게?

  결국 오늘도 시와 기도와 노래가 남는다. 부디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기억해 주길. 그래서 언젠가 문득 세상에서 유리되어 불안에 떠는 눈동자를 마주친다면 그가 나인 듯 여기며 손을 뻗길, 마음 한켠에 그런 자리를 내어 둘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살아가길. 그런 공포가 잘 보이지 않는 일상을 살 때도 잊지 말라고 꾹꾹 눌러 적어 둔다. 언젠가 다시 이 글을 펴볼 때 내가 부끄러운 마음이 아니기를.




다리를 건너 폭포를 지나도
찬란한 세계가 있지는 않을 거야
싸늘한 밤들이 불안하여도
나무는 내게 견디라 하네

노래를 하리 시를 말하리
멈추지 않는 내 경건한 기도는
혐오와 허무를 삼키는 노래
그리움과 향수의 입김이 분다

길은 끝없고 나는 멀어지지만
결국 이곳으로 길은 다시 이어지고

사랑스러운 동경의 별들이 빛나면
나 또 다시 방랑자 되려 하겠나

_정밀아,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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