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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12. 2018

끝의 끝, 떠남의 미학

어깨에 질 수 있는 만큼만 들 것


웃으며 다음 주에 또 보자고 할 것만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인사.


  누구든 시작은 서툴지만 1년이 지나가면 어영부영 적응하기 마련이다. 콕 집어 1년이라 하는 이유는 한 해가 가야 대략 언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굴러가는지가 얼추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10월을 세 번째 맞다보니 이제 10월이 얼마나 바쁜 시기인지도 알아 9월부터 마음을 다진다. 아이들 시험 기간 2주, “다사라”라는 이름의 힌두교 여신을 기념하는 축제 기간 2주로 복닥복닥 바쁘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11월이 온다. 11월은 늘 “빛의 축제”라 불리는 “디왈리” 축제와 함께 찾아온다. 연이은 축제로 거리 곳곳에서 폭죽이 펑펑 터지고 사람들이 반짝이는 옷을 입는, 모두가 들뜨는 계절이다.


  온 동네가 들썩들썩하는 그 계절에 나만은 속하지 못했다. 올해는 10월과 함께 나도 인도를 떠난다. 나에게만은 11월이 빛과 폭죽 대신 이별을 데려올 것이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울적해지는지. 그렇게 부유하는 기분이 들면 옛 일기장을 펴 본다.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과 내 마음이 방울방울 떠오른다. 있는 힘껏 애쓰며 헤쳐 나가는 것과, 흘러가는 생生 가운데 겸허히 거하는 것이 씨실과 날실처럼 짜여 들어간 시간. 그리고 어느덧 시간의 마디가 꺾이고 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나는, 그리고 여기서 함께한 우리는 또 얼마나 달라져 갈까.



  몸이 한국으로 이동하는 건 단 하룻밤의 비행이면 되지만 사람들과의 이별은 토막토막 몇 주에 걸쳐 이루어진다. HIV/AIDS 사업장의 후원 아동들에게 식량을 배분하는 날, 내게는 마지막이 될 그 행사 날은 이별의 정점이었다. 원래는 늘 셋째 주 일요일에 하던 것인데, 연휴 때문에 사람들이 시골 고향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면 진행이 어려워 이번 달만 일정을 당겼다. 한 장씩 편지를 쓰고 작은 선물을 준비해 하나씩 포장해 주려던 생각이었는데 준비가 다급해졌다. 결국 전날 새벽 세 시까지 앉아 구부렁구부렁 글씨를 쓰며 이렇게 날림으로 쓰는 편지가 의미는 있을까 회의가 들었지만 그래도 내겐 이게 최선이었다. 우리의 이별 당일, 피곤한 내 얼굴은 푸석했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눈이 반짝 뜨였다.


  한 번쯤은 꼭 사주고 싶었던 간식까지 사 들고 가니 아이들 반 정도가 이미 와 있었다. 대부분 먼 길을 오는 걸 감안하면 매우 빨리 온 편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얼굴들이 환하다. 이번 달부터 처음으로 후원을 받는 아동들이 추가된 덕분에 인원이 갑자기 대폭 늘어,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이길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평소보다 더욱 길었다. 우리 간사들은 다 같이 할 수 있는 게임을 두어 가지 준비하여 아이들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간단한 게임인데 아이들이 순수한 건지 그냥 분위기 자체가 들떠서인지 다들 즐겁다.


  한참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 현지인 간사가 앞에 섰다. 오늘이 써니가 여기 함께 있는 마지막 식량 분배 행사니까, 우리 모두 써니와 인사를 하자고. 덕분에 앞에 불려 나갔다. 미리 언질 받은 것도, 뭐라 말하겠다고 준비한 것도 없었지만 사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뚜렷하게 그려지던 이야기가 있었다. 꼭,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는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소박을 맞은 할머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들을 바랐다. 그렇게 할머니로부터 엄마에게로, 내게로 대물림되어야 했던 상처에 대해서. 그런 할머니를 만나 가정을 버리고 나온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물려준 병이 내게 있다는 이야기도 꺼낸다.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는 사소한 피부병.


  남들의 손발에는 나보다 한 겹 더 지방이 덮여 있다는데, 내겐 그게 없어서 손발 피부가 붉고 습진처럼 벗겨진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흠칫 놀라는 시선이 조금 불편할 뿐, 실생활에 크게 불편한 건 없었다. 남들보다 손끝이 여물지 못해서 병이나 캔을 잘 따지 못하는 편이지만, 그게 이 병 때문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다가 늘 “나 이거 따 줘”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으므로 뭐 괜찮았다.


  어릴 땐 괜찮지 않았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치원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틀린 것처럼 소외되었다.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 나는 나 자신이 내향적이라고 믿으며 좁게 벽을 친 채로 살았다. 나를 아껴 주는 마음으로 살갑게 던져지는 질문도 그 좁은 벽 안에 들어오면 뒤틀려버렸다. 누군가 걱정을 하며 혀를 끌끌 차는 순간,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내 손으로 다가왔으므로 나는 별로 그런 걱정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았다. “손이 왜 그래?”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설명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20년쯤 하려니까 귀찮아져서, 나중에는 내 빨간 손을 본 누군가가 밖이 춥냐고 손이 얼었다고 걱정하면 그냥 네, 하고 손을 녹이곤 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갖게 된 거절의 인상으로 인해, 아주 오랫동안 모든 것을 거절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주변에서 날 아껴주든 아니든 늘 외로움에 허덕였다. 명백히 날 향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이 사람 내가 싫은데 그냥 억지로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불안한 질문이 올라와 나는 사랑으로부터 자주 도망치곤 했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하면서. 나는 사랑받지 못한 게 아니라 주변에서 날 사랑해줘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구나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깨달음과 동시에 많은 벽이 허물어졌다.


  그런 시간을 거쳐 이제는 더 이상 아무렇지 않아, 라고 말을 맺었다. 그리고 이미 위로받은 어린 시절의 내게서 눈을 들어, 이제 내 앞에 앉아있는 올망졸망한 눈동자들을 보았다. 내가 이 아이들을 사랑한 마음은 내 어린 시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나를 찾아온 위로가 아이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내게 그렇게 해 주었던 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해주고픈 마음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엄마를 책임져야만 할 것 같은, 그래서 상처와 상처가 맞붙는 현장에서 더 치열하게 상대방에게 지지 않게 엄마의 콧대를 높여야만 할 것 같았던 어린 날의 치기를. 그리고 비슷한 마음으로 엄마에 대한 책임감을 안고 눈물을 삼키는 내 눈 앞의 어린 눈동자들을 본다.

  또 기억한다. ‘내’가 아닌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이유로 소외되었던 어린 날의 서러움을. 다른 조각으로 비슷하게 소외당하고 이제 다음 발걸음을 떼면서도 두려움이 서린 눈동자들을 본다.


  사랑을 받아 이제는 건강해진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이제 괜찮듯, 너희 삶도 그럴 거라고. 지금 너희의 상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그런 말은 누구도 할 수 없겠지만… 지금 상처가 훗날 아물 수 있다는 말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바라본다.


  나의 어제와 그들의 오늘, 나의 오늘과 그들의 미래를 가로지르는 교차점을 본다. 전보다 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어머니가 있고, 그런 줄 몰랐다면서 내 손을 잡아 오는 아버지가 있다. 오늘이 마지막인 줄 몰랐다고 당혹스러워하는 눈이 있고, 알았음에도 눈물이 흘러 한참 진정하지 못하는 눈이 있다. 그런 건 잘 모르고 마냥 해맑게, 마치 내일 또 볼 것처럼 써니디디 안녕- 웃으며 인사를 하는 어린 눈도 있다.


누구나 인도를 다르게 기억하지만... 나의 인도는 그 눈망울들 덕에 따스한 꽃밭 같았다.

  우리는 헤어지지만, ‘우리’로 묶어 부르며 눈동자를 마주치는 건 여기서 끝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끝은 아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동화에 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해가 지고 바람이 불 듯 계속해서 즐거운 일도 어려운 일도 찾아올 테지. 이제는 여기 함께 서 있을 수 없지만, 마음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기술 좋은 세상이니 마음뿐 아니라 통화도, 영상 통화도 할 수 있고 서로의 사진을 주고받을 수도 있지. 열심히 살다가 기회가 닿는다면 내가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얼굴 보러 올 수도 있겠지. 우리의 대화는, 우리의 눈 맞춤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 끝의 끝에서 나는 짐을 싼다. 짐 몇 번 싸고 풀기를 반복한 지난 몇 년 만으로도 쉬이 터득한, 그러나 실천이 영 잘 되지 않는 “어깨에 질 수 있을 만큼만, 내가 나를 수 있을 만큼만 들고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떠남의 미학을 기억한다. 일은 마무리해 두었고, 나의 마음은 이곳에 남겼다. 대신 내 안에 깊은 눈동자로 남은 ‘사람’을 하나씩 갈무리해 든다. 나를 내려놓고 너를 품는 것, 그게 내가 들 수 있는 유일한 무게였다.


  얼추 2년 정도 이곳에 살았다. 그동안 나도 변했고 내가 돌아갈 곳도 변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건 사람이다. 얽히고설킨 연리지 같은 관계고 사랑이다. 매 순간 그 힘을 보고 배우는 시간이었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그것이었다. 우리는 사랑 받음으로써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사랑함으로써 삶을 이어 갈 힘을 얻는다고. 그러니 더욱 사랑하자, 사랑받자고. 나를,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우리를.


  그 작은 기적 하나 품고 간다면, 마음속에만 품고 한 번 실천하지 못했던 떠남의 미학에 제법 걸 맞는 산뜻한 끝이 아닐까. 사실 산뜻한 이별 같은 건 없지만, 나는 또 울겠지만- 괜찮다. 같은 하늘 아래 있음이 행복했고, 삶은 계속될 테니. 재회의 날이 오지 않는다 한들 내겐 믿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울면서도 갈 길은 가야 하니까. 먼지가 나부끼고 태양이 작열하는 이 땅은 곧 꿈처럼 내게 닫힐 테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그 10월의 마지막 밤처럼 나는 곧 차갑고 고요하게 고국 땅을 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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