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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Oct 24. 2021

현실이 아닌 곳으로

영화: 아네트 (2021, 레오 카락스 감독)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건 서사일까. 물론 이야기의 기승전결 뼈대는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서사를 통해서도 감정을 실어나르는 쪽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사뿐 아니라 미술, 음악, 카메라 등 모든 요소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협업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서사 없는 영화는 있어도 감정 없는 영화는 없다고도 느낀다. <아네트>도 그렇다. 서사는 자못 단순하지만 그 안의 감정은 깊다.



감독 본인이 초반에 등장해 이제 시작하자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은 딸이다.), 배우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 영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 극임을 똑똑히 못박는다. 이제 이 선을 넘어 현실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몰입할 이 세계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안길 것인가.


기대하는 관객 앞에, 이 영화를 함께 제작한 밴드 스팍스에 이어 배우들이 노래하며 차례차례 등장한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야르, 사이먼 헬버그까지 나란히 서서 노래할 때, "So may we start? 이제 시작할까요?" 하고 물을 때,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 생각도 나고 뮤지컬 시작할 때 같은 기분도 든다.



영화는 (마리옹 꼬띠야르) 헨리(아담 드라이버)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사람  무대에 오르는 직업이지만 양상은 많이 다르다. 오페라 가수인 앤은 드레스를 입고 무대보다  높은 무대로 올라가 장렬한 죽음을 맞는 반면,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는 속옷 하나에 복서들처럼 로브 차림으로 직접 문을 열고 나와 마이크 줄을 채찍처럼 휘두른다. 어딜 가든 사과를 깨물고 있는 , 담배와 바나나를 들고 몸을 푸는 헨리. 관객을 죽여주는 헨리와 관객을 위해 죽어줌으로써 그들을 구원하는 .  사람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둘을 보는 시선까지도 모두 다르다.



두 사람의 노래는 "We love each other so much 우리는 서로를 정말 사랑해"라는 가사를 반복한다. 둘을 둘러싼 세간의 시선을 잘 알고 있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푹 빠져있지만, 그 한 마디만 반복하는 사랑은 어쩐지 불안하다. 숲을 지나, 세상과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둘은 이내 결혼식을 올린다. 각자의 예술, 함께 부르는 노래, 중간중간 삽입된 기자들의 대사나 뉴스 보도를 통해, 사랑의 서사는 단순하게 쌓인다.



송스루 뮤지컬이란 참 특이한 장르다.  모든 대사가 노래로 표현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인물의 표정과 입 모양으로 단박에 구분될 대사와 독백, 방백이 따로 없이 모두 노래로 흘러나온다. 그러다 보니 기묘하게 현실에서 들뜬 느낌, 현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레오 카락스 감독 특유의 독특한 스타일은 한층 더 새로운 감각들을 이끌어낸다.


무대에 오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한 사람은 승승장구를 한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감정의 골이 쌓이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단순한 이야기에 스타일을 부여하면서, 기묘하게 현실에서 반쯤 떠오른 느낌을 준다. 인물들이 입는 원색 옷과 계속 등장하는 소품의 색깔조차 꾸며진 세계의 느낌을 더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아빠의 농담과 엄마의 웃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네트는 작은 목각인형으로 표현된다. 불쾌한 골짜기에 걸친, 그러니까 애매하게 사람을 닮다 말아서 더 기묘한 기분이 드는 모양새다. 이런 불쾌한 골짜기에 놓인 물체들은 어쩐지 자꾸 눈을 의심하면서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징그러워 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그것을 계속 바라본다. 왜일까. 내가 바라보게 되는 건 어떤 지점일까.


아마도 죽음과 가까운 어딘가. 이 영화는 그곳을 심연(abyss)으로 부른다. 엔딩 크레디트의 스페셜 땡스투에 에드거 앨런 포가 있어 의아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토대로 쓴 곡이 있다고 감독이 밝힌다. "바다 위의 절벽에 매달린 상태로 바다를 쳐다보면 떨어져서 죽을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 쳐다본다. 멈출 수가 없는 거다. 그게 바로 심연에 대한 마음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과 같은 것." (GQ코리아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 중에서)



극중 인물들은 모두 죽을 걸 알고도 뛰어드는 사람들처럼 존재한다. 생사를 의식하지 않는 인물들의 생사. 생에 아득바득하지 않는, 오히려 그 심연을 바라보는 인물들. 어쩌면 그 점이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을 무대 위 존재로 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넓게 보면 아네트뿐 아니라 모두가 목각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다. 인물들은 마지막 장면에서야 내게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였을까. 엔딩 장면을 보는 내내 이유 모를 눈물이 줄줄 났다.



인간은 왜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가. 아니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가. 무엇에서 눈을 떼고 심연으로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헨리의 삶으로 영화는 대답한다. 감독이 자랑스럽게 또 사랑스럽게 언급하는 그 딸의 존재를 비롯하여, 헨리에게서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냄새가 난다. 감독의 개인사는 물론 감독이 스스로에게 갖는 감정들이 반영된 캐릭터로 보인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는,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는 엔딩 장면은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말이 들어있다. 심연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 응시하던 것들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뜻으로 치환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과 예술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던, 고된 것 같아도 자부심으로 빛나던 얼굴을 잃지 않고 삶에 발 디딘 채 살라는 말로.



극중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불쾌한 골짜기 너머 심연의 존재를 인식하며,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온통 엉켜 있는 영화 바깥으로 나온다. 아주 어쩌면, 영화 산업의 빛과 어둠을 하나로 뭉치면 이 영화와 같은 색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끼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막이 오르면 세상은 무대가 되고, 막이 내리면 우리는 영화 바깥으로 다시 정중하게 퇴장을 요구받는다. 엔딩 크레디트 다음에 나오는, 인물들이 등을 들고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래는 "좋았다면 친구에게 이야기하세요. 친구가 없다면 모르는 사람한테라도 이야기하세요."라는 가사가 귀엽기까지 하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 안녕히 돌아오면서, 등 뒤로 막이 내리고 문이 닫힌 것 같은 착각마저 느낀다. 심연 대신 삶을 응시하며 걸어간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GQ코리아의 레오 카락스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를 참고하고 인용하였습니다.
https://www.gqkorea.co.kr/2021/10/19/%EB%A0%88%EC%98%A4-%EC%B9%B4%EB%9D%BD%EC%8A%A4%EC%9D%98-%EC%84%A0%EB%AA%85%ED%95%9C-%EC%84%B8%EA%B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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