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Dec 18. 2022

싸움은 기세로 이기는 것

영화 <지옥의 화원> 리뷰 (2021, 세키 카즈아키 감독)

사람은 참 재미있다. 많은 사람이 한 가지 목적으로 모인 집단은 더 재미있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고 정서도 너무나 다른데, 집단으로 묶이는 순간 새로운 집단 심리가 탄생한다. 예컨대 모든 것이 정반대 같은 사람들도 '집에 가고 싶군….'이라는 말만큼은 같이 하고 있다든지. 학생 때, 아니 그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신입 때만 해도 힘차게 '넵!'을 외치던 사람들이 기묘하게 기운이 없어졌다든지.


그렇기에 이 영화 포스터를 보는 순간 묘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힌다.



회사원은 언제나 싸우고 싶다니. 그 말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일에 관한 논쟁이 됐든, 그 과정에서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순간이든, 싸우고 싶은 마음은 직장인의 뇌리를 꽤나 자주 스친다. 그러나 기묘하게 기운이 없어진 직장인들은 싸울 힘도 별로 없다. 굳이 따지자면 좋게 좋게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런데 그 직장인들이 업무 외적으로 싸운다면?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 교실 밖에서 패싸움하던 학생들처럼 직장인들에게도 그런 패거리가 있다면? 이 영화는 그 패거리가 존재할 뿐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가장 현실적인 현실(=직장)에 한 겹의 판타지를 얹어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다소 황당한 설정이지만 원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다 일부 진실과 일부 거짓을 섞을   자연스러운 창조가 가능한 법이다. 패싸움을 직접 겪어본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미디어 덕에 낯익은 소재라서, 익숙한 문법끼리의 조합인 데다가 그걸 메타적으로 설명해주는 내레이션이 친절하여 영화에 곧잘 녹아들  있다. 패거리를 이루고, (왜?) 서로 평정하고, (대체 ?) 우열을 가리고, (산재 처리는 되나?) 심지어 다른 회사까지 찾아가 도장 깨기를 한다. (대체 일은 언제 ?)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계산과 이해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된다. 보고 있다 보면 기묘한 친근감마저 든다. 어쩌면 위계로 짓눌러 속수무책의 "직장 내 괴롭힘"을 만들어내고 웃으면서 수동적 공격으로 속을 뒤집는 것보다는 대놓고 치고받고 싸우는 게 속 편해 보이기도 하고...


중간부터는 여직원이라고 칭하자니 몸싸움 상대로는 다소 억울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혹시 이것이 유리천장들의 억울한 파이 싸움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나 혼자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아니면 정말 많은 의미를 심어둔 걸까? 기묘한 고민이 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조차 우습고 유쾌하게 흘러가는 즐거운 코미디 영화다.



"캐릭터가 맛있고 배우들이 친절해요"라고 별점 가득 맛집 리뷰라도 남기고 싶을 만큼, 배우들이 캐릭터를 선명하게 살려낸다. 다소 과장될 수밖에 없는 표정과 대사, 캐릭터들임에도 들뜨는 인물 하나 없이, 방금 갓 만화에서 길어 올린 활어처럼 통통 튀어 오른다. 그렇게 죽일 듯이 때려놓지만, 의리도 있고 일반인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묘한 정의감도 있으며, 심지어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철저하게 한다. 저러면 일은 대체 언제 하나 싶지만 전화도 친절하게 받고 회사 비품 하나까지 세심히 챙기는 성실한 직원들이기도 하다. 매력이 없을 수가 없다. 일본 남자 배우 기근이 심각해 보이던데 그 어려움을 이렇게 출연진 여초 현상으로 타파해 보려는 걸까 문득 그런 궁금증마저 들 만큼 모든 여자 배우들의 기세가 좋다.



그 중에서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두 사람. 등장하자마자 회사를 평정해 버린,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멋지게 등장한 란(히로세 아리스), 달콤한 케이크나 낮잠 같은 가볍고 나른한 주제로 스몰 토크를 하던 '평범한 여직원'이었다가 우연히 란과 친해지며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나오(나가노 메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소년 만화의 공식대로 풀어낸 메타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돕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싸움이든 일이든 이렇게 여성들이 다 해 먹는 작품에는 통쾌함이 있다. 소년만화에서 남자아이들에게만 부여하던 역할들을 여자들끼리 이리저리 나누고, 배역 이름조차 없이 "여자 1" 심지어 "여자 시체 1"이 되기 십상이었던 희미한 배역들마저 성별 반전이 이루어졌다. 이건 교묘한 미러링인가? "경단녀"들의 세계와 같은 행동 다른 반응의 세계를 비틀어 꼬집는 것인가? 별생각 없이 즐거운 영화인데 또 나 혼자 멀리 가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관객의 즐거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데, 결말이 또 반전을 선사한다. 정말이지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영화였다.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유머 한 방, 누군가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엔딩이라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결말을 딱 1분만 도려내고 싶었다. 내 취향에는 아쉬움이 깊은 마무리였음에도 이 영화가 싫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영화의 뚝심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황당해하든 헛웃음을 짓든 아쉬워하든 아랑곳 않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뚝심으로 이루어진 영화라서 마음이 끌린다.


그래. 뭐든 자기 '쪼'대로 가는 게 힙이든 핫이든 쿨이든 되는 거다. 유치하면 어떻고 뻔뻔하면 어때. 뭐가 됐든 하는 데까지 몰아붙이면 뭐라도 된다. 일본 영화계가 갈라파고스화됐다는 평을 숱하게 듣는다 해도, 누구나 좋아할 만한 풋풋한 사랑의 감성이나 싱그러운 꿈의 색채가 아니어도 뭐 어때. 어쩐지 잡다하게 눌어붙은 무거운 마음이나 고민 같은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내 쪼대로 가면 될 것 같다는, 묘한 힘이 솟아난다. 싸우는 직장인을 보고 나와서 성실한 직장인이 될 사람이 여기 있어요...


어쩐지  점은 싸움과도 닮은 구석이 있. 싸움은 결국 기세로 하는  아닐까? 전력이 비슷하다면 자기 기세를 끝까지 몰아붙이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 누구도 완패할  없는 영화다.



즐겁게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어쩐지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한 번 더 말을 걸고 싶어진다. 중간중간 이 "소년만화"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짚어보는 인물들에게. 그동안 자리가 허락되지 않던 이야기를 전복하고 그 안에서 내 위치를 잡은 모습 정말 너무 좋았는데, 그런데 꼭 그 이야기의 문법으로만 자신를 규정할 필요도 없다고. 각자가 주인공으로 각자의 해피 엔딩을 그려내면 된다고. 싸움 짱 여직원을 찾아가 결투를 신청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의 엔딩에도 그렇게 저항을 해 본다.


오늘 듣고 싶은 노래는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보니 핑크의 happy ending. "믿어보렴 happy ending 네가 손 뻗은 바로 그 끝에 있어" 이 느낌으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도 이렇게 자기만의 기세로 싸움을 몰아붙이는 영화들이 많이 찾아와주길!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12월 15일에 개봉한 영화로 지금 극장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