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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r 01. 2023

help or hurt

영화 <더 웨일> 리뷰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

  핑계 없는 무덤은 없고, 나의 모든 행동에는 늘 이유가 있다. 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낙인찍듯 단편적으로 결론 내려질 때 억울하다. 그러나 동시에 인터넷에 올라오는, 짧은 영상이나 몇 줄 글만으로 상대를 쉽게 간파했다 생각하며 낙인찍듯 손쉽게 말한다. 사람은 정말 왜 이럴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내일 되면 뉴스 속 누군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나는 또 왜 이럴까?


  영화 <더 웨일>의 주인공 찰리는 사랑스럽기만 한 캐릭터는 아니다.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종합할 때, 그가 과거에 내린 선택이나 행동들이 남긴 상처를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나 건강하지 않은 몸과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괜찮다, 미안하다, 말을 달고 있는 그의 측은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궁금해진다. 무엇이 그를 저렇게 몰았을까?



#hurt: 상처받은 마음


  극이 진행되면서 조각조각 이어지는 정보들을 통해, 관객은 찰리의 삶을 스친 일들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상처와 그에게 남은 상처. 너무 사랑한 것들이 소실된 자리에 남은 커다란 상처들. 그 자리는 어쩌면 누군가가 쓰던, 지금은 텅 비어버린 방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찰리로서는 들어갈 수도 없는 방.


  찰리는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여기까지 왔다. ‘저렇게 먹으면 없던 병도 생기겠는데…’ 싶은 음식을 욱욱거리며 밀어 넣은 끝에 그가 토해내는 것은 눈물이다. 눈물을 토하기 위해 음식을 토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눈물도 토해내기 어려운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 안에서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했던 찰리는 이제 잔뜩 지친 고래처럼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그 자리에서 그가 꺼낸 카드는 뜻밖에도 딸이다. 상처를 주었던 존재이자, 이제 상처를 되돌려 받으면서도 바라보는 존재.



#help: 도움의 손길


  이 극에는 찰리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친구 리즈는 찰리의 필요를 살피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함께 있다. 찰리의 서사를 공유하고 있고, 찰리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다. 찰리의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 뻔한 음식도 사다 준다. 이대로는 찰리의 죽음이 가까워져 온다는 걸 감지하지만, 찰리의 방향성을 바꾸려 하진 않는다. 리즈는 인간이 결코 서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믿으니까.


  반면 토마스는 자신이 보기에 찰리에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따금 찰리를 찾아온다. 찰리의 건강 상태에 대해 알고 난 후로 오히려 찰리에게 더욱 접근하며, 찰리의 방향성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는 자신이 내미는 손길이 선의의 도움, 도움닫기를 할 수 있도록 내미는 발판 같은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본 도움이 있다면, 메리가 앨런에게 건넸다는 “May I help you?”라는 말에서. 어쩌면 종교인들이 그토록 목 놓아 외치는 복음은 그 안에 있는 것 같다. 메리에게는 사랑이 있다. 오랜 고통과 절연의 시간 끝에서 상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 자리에 생명이 있다. 이제는 말해도 소용없는 추억들을 굳이 더듬거리면서 듣는 숨소리. 상처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잠깐 내보이는 그 속살 같은 마음.


  그 마음을 찰리도 느꼈는지 모른다. 토마스가 엘리에 대해 말하면서 “날 도우려고 한 건지 아니면 상처 주려고 한 건지help me or hurt me” 모르겠다고 할 때, 그게 도움이었다고 판단한 걸 보면. 결국 상처를 남겼지만 사랑한 대상에게서 미진하나마 포용을 보고, 그는 날아오르는 고래가 된다.



#love, 어쩌면 그것이 사랑


   찰리뿐 아니라 이 극 속의 인물들은 제각각의 생채기가 나 있기에,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상처 난 마음에서 배어 나오는 말들은 절반의 진실만을 품고 있다. 사람은 사람의 무게를 온전히 구원할 수 없다는 리즈의 말도 맞지만,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무조건 외면할 수 없다는 찰리의 말도 맞다.


   그 안에서 help와 hurt는 어쩌면 한 끗 차이다. 종교적인 행위의 일탈에 대한 토마스의 이중적인 태도에서 help라는 말에 감추어져 있던 hurt를 보아도, help로도 hurt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는 엘리의 행동을 보아도, hurt의 마음을 품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은 괴로워하면서도 help가 우러나왔던 메리의 마음을 보더라도. help와 hurt는 모순적으로 뒤죽박죽이다.


   인간과 인간이 솔직한 마음을 부딪는 일은 너무 어렵지만, 어쩌면 그것이 사랑인지 모른다. 솔직하게 마음을 여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의 서사에 귀를 기울이며 포용하는 것. 지저분해진 찰리의 방에 붙어 있는 포스터는 하필 <템페스트>다. 복수 대신 포용과 용서로 화해라는 결말을 이루는 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서사를 품고 있다. 찰리가 토마스에게 했던 말처럼, 누구에게나 겉보기로 알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어쩌면 ‘전형적인’ 사람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사는 계시처럼 받아들이면서 타인의 서사를 견디지 못한다면 그들의 help는 hurt밖에 될 수 없으며, 사랑은 전해지지 않고, 구원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솔직할 것. 마음을 열 것. 그것이 모든 처음이다. 그 작은 단추를 풀지 못하면 온 생에 상처가 남고 만다. 고래를 향한 “가엾은 집념”으로 가득한 <모비 딕>의 늙은 선장처럼. 동시에 이는 모든 끝이기도 하다. 남은 상처를 다시 헤아리게 만드는 힘 또한 여기에서 비롯되니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무수하게 변용되고 변주되며 닳고 해진 문장. 우리가 모두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이 문장을, 빛나는 고래 같은 찰리의 순간들을 통해 다시 헤아려 본다. 솔직하게, 열린 마음으로.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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