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Jul 02. 2023

로맨스 없이도 로맨틱

[BIFAN 데일리] 영화 <킬링 로맨스> 리뷰

감독] 이원석

출연] 이하늬 이선균 공명 배유람

시놉시스] 대재앙 같은 발연기로 국민 조롱거리로 전락한 톱스타 ‘여래’(이하늬).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남태평양 ‘콸라’섬에서 운명처럼 자신을 구해준 재벌 ‘조나단’(이선균)을 만나 결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서울대가 당연한 집안에서 홀로 고독한 입시 싸움 중인 4수생 ‘범우’(공명)는 한때 자신의 최애였던 여래가 옆집에 이사온 것을 알게 되고 날마다 옥상에서 단독 팬미팅(?)을 여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조나단의 사업 확장을 위한 인형 역할에 지친 여래는 완벽한 스크린 컴백을 위해 범우에게 SOS를 보내게 되고 이들은 여래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죽여주는 계획을 함께 모의하는데…




2023년 개봉작 중 입소문으로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은 역시나 <킬링 로맨스> 아닐까. “재미있겠네. 다음에 봐야지…” 정도로 가볍게 바라보고 있던 이 영화는 극단의 호불호 후기와, 해탈한 듯한 배우들의 인터뷰, 무대 인사 후기까지 죄다 재미있었다. 이제 영화만 재미있으면 되는데. 나는 <킬링 로맨스>를 보기 전에 감독의 전작 <남자사용설명서>부터 보았다. 이십대 초반 아직 풋풋하던 내가 극장에서 보기엔 너무… 포스터가 이상해 보였던 작품이었는데, 생각보다 좋았고 생각보다 웃겼으며 생각보다 뇌리에 남았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무반주 음악에 흠… 하핫… 핫초ㅑ… 하며 뻘쭘한 춤을 추던 배우 오정세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버렸다.)


이것도 재미있겠군! 웃기겠군! 좋겠군! 기대하며 <킬링 로맨스>를 보았다. 재미있었고 웃겼고 좋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영화의 어느 한 구석이 나의 오타쿠 감성을 자극하고 말았으니… 나는 감동까지 받아버리고 말았다. 팬과 스타, 로맨스 없이 로맨틱한 그 관계에 대하여.



#1. 브리트니 스피어스 <Lucky>

태초에 “She was everywhere”였던 누군가가 있었다. 존재 자체로 센세이션. 그를 모두가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너무 일방적이고 그만큼 오해와 편견에 빛을 잃기도 쉬워…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Lucky> 노래 가사처럼, 그토록 사랑을 받는 스타는 밤에 혼자 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센세이션이 저물고, 세상은 “사랑”할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의 여래(이하늬 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브리트니의 노래 가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무수한 말, 쏟아지던 조롱과 비슷한.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노래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HOT의 <행복> 말이다.


기묘한 마이페이스로 밀어붙이면 상대는 기세에 눌리기 쉽다. 마치 괴한을 쫓던 그의 “powerful punch”처럼. 그러나 비대한 자의식에 자리를 내어주느라 상대의 자아에는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의 언어와 행복의 노래를 가장한다 해도. 이미 세간은 이 가장을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로 담아낸 지 오래다.


#2. HOT의 <행복>과 레드벨벳의 <행복>

조나단의 입버릇은 ‘완성’이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프레임 속 여래의 미소는 랄라텐 광고 속의 미소 반만큼도 살아있지 않다. 옆집 사수생 범우에게 받아 든 랄라텐을 예의 실력으로 순식간에 마셔버린 다음 미소를 짓는 여래는, 랄라텐 마시는 속도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실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연예인인데 말이다. 그는 조나단의, 조나단을 위한, 조나단에 의한 조나단 월드에 갇혀 있다.



조나단이 귤을 쥐는 순간, 이 영화에 귤이 처음 등장한 순간, 아직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소름이 돋았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폭력의 수단이 무엇이든 폭력은 폭력이다. 뭐든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건 그 폭력성이다. 새콤달콤한 귤에 죄가 없다고 귤을 이용한 폭력이 죄 아닐 리 없을 것이다.


수단에 감정 이입하는 건 모두 틀렸다. 폭력의 수단뿐 아니라 행복의 수단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노래는 새로 부르면 된다. 레드벨벳의 <행복>을 불러도 되는 거고, HOT 노래를 NCT가 리메이크할 수도 있는 거고요. (참고로 그 곡은 행복이 아니라 <캔디>이며, 공명의 동생 도영은 거기 없었지만… 이선균 씨 참고 바랍니다.) 게다가 잘 들어 보면 여래의 필모그래피에는 이미 <행복>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다. 수단은 바꿔치울 수 있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칸트처럼 말해 보자.



#3. 에픽하이 <fan> 대신 자우림의 <fan>

가스라이팅 앞에 기꺼이 “bad girl”이 되겠다 일갈하고, <제발>을 부르며 일어선 여래의 분연한 얼굴은 분명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그 덕분에 방범등은 꺼지는 순간 축포가 되고, 바로 그 순간 달은 가득 차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가 계속 주목하게 된 건 여래와 범우 사이의 마음이었다. 7년째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노래로 자기 삶을 응원한다는 건 어떤 마음인가. 비록 범우는 여래의 소원을 척척 이루어 주지도, 여래와 같은 마음으로 손발을 척척 맞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래가 돌아갈 과거가 다시 여래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런 범우가 영화 속에서 불가능을 넘어 소통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라는 점 또한 괜스레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런 목소리라면 닿을 것이다. 여래에게 닿았듯이. 진심으로 표현하고 소통하고자 했으나 끝내 대중과 화해하지 못하고 떠난 어떤 이들에게도.


세상에는 범우의 다락방 같은 방이 얼마나 많을까. 부디 거기서 울려 퍼지는 팬의 노래가 에픽하이의 곡보다는 자우림의 곡에 더 가까웠으면 한다. 가질 수가 없는 미친 사랑을 괴로워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더 행복하니까.



#4. 그리고 어느 팬에게 남은 말

한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 오래오래, 시간을 따라 함께 기쁘게 뛰어보자고. 땀 나고 타조 깃털 휘날리는 길이더라도, 같이 뛰어가고 싶다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노래를 부르고(“누나 왜 노래를…”), 거기서 함께 힘을 얻으면서 가보자고. 무지하게 겁나도 끝까지. 그렇게.


나는 당신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 세월 따라 더해지는 표정, 그런 것들을 오래 보고 싶다고. 그런 모습이 좋다고. 그냥 이 작업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즐거운 것이었으면 한다고.

로맨스가 아니어도 충분히 로맨틱한, 어떤 행복이라고.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중 상영일정

7월 1일 19:30-21:17 한국만화박물관 (상영코드 337)

7월 5일 19:30-21:17 CGV소풍 4관 (상영코드 733)


매거진의 이전글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