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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규 May 27. 2018

[서평] 하루키의 원작소설은 <버닝>과 어떻게 다른가

<헛간을 태우다> 책리뷰: 영화 <버닝>으로 35년 만에 새단장한 하루키

[서평] 하루키의 원작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영화 <버닝>과 어떻게 다를까?

<헛간을 태우다> 북리뷰 : 영화 <버닝>으로 35년 만에 새 단장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 이 글은 本 브런치의 운영자가 시민기자 자격으로 언론사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글의 원본입니다.


출처 : 문학동네 & KDMB


35년 만의 부활, 그리고 변신


영화 <버닝>의 원작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이다. <헛간을 태우다>는 1983년 작이다. 1983년생 일본 문학이 요 근래 한국영화로 장르를 바꿔 입고 프랑스 칸까지 순례를 떠났다 온 셈이다. 그렇게 하루키의 소설은 35년 만에 현재 우리나라에서 열렬히 재조명을 받는 중이다. 


소설은 영화로 부활하면서 색채도 많이 달라졌다. 소설 속 화자였던 유부남은 상실감에 허덕이는 청년으로 바뀌었고, 그저 정체가 묘연하다는 것 외에 아무런 특징도 없던 ‘위대한 개츠비’는 의뭉스러운 금수저로 변모했다. 그나마 본래 모습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 ‘그녀’ 정도랄까. 소설 안에서는 “헛간을 태우겠다!”는 범행 계획만 있었던 것이, 주체와 대상은 달라졌지만 어쨌든 영화 안에서는 실제 방화로 진화했다. ‘그녀’과 교류만 했던 화자는 영화에서 교‘감’을 하는 남자로 거듭난다. 우리의 ‘위대한 개츠비’는 발음상 ‘Barn(헛간을 뜻하는 영어)’과 ‘燔(태울 번)’을 연상시키는 듯한 ‘벤’으로 번듯이 이름까지 갖게 되었다. 


이렇듯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는 얼개만 살펴봐도 원작 소설은 영화 <버닝>과 결이 많이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적인 차이가 필연적으로 내용의 차이까지 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이 내용상의 차이들이야말로 영화 <버닝>을 보기 전에 -혹은 그를 감상한 후에라도- 관람객 입장에서 알아두면 좋을 법한 비평거리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와의 차이 ① : 방화의 이유  


내용 측면에서 원작 소설과 영화의 유일한 공통점은 '한 여성이 실종한다는 점',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헛간을 태운다는 그 남자가 영 미심쩍다는 점', 그 두 가지뿐이다. 80년대 초반, 이 모티프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8년대의 이창동 감독과 같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꾸려냈다.  


‘그레이트 개츠비’는 자신의 모럴리티(도덕성)를 유지하기 위해 가끔씩 헛간을 태운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모럴리티는 인간의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면모들을 균형 있게 만듦으로써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식을 하는 인간인데 단식을 즐기기도 한다. 이지적인 인간인데, 그는 때때로 감성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는 정숙한 인간이 간혹 불금이나 불토에 일탈을 만끽한다. 이런 인간들은 ‘그레이트 개츠비’가 보기에 모럴리티를 유지하려 애쓰는 인간들이다. 평소에는 준법 시민이지만, 두 달가량 한 번씩 범죄를 저지르는 본인처럼 말이다.  


그 남자에게 헛간은 소멸시켜줘야 할 대상이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스스로 타버리기를 원하는 존재들이 있다고. 그리고 그래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다하는 존재가 있게 마련이라고. 자신은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면서 헛간들의 모럴리티를 유지시키고, 본인의 모럴리티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출처 : 영화 <버닝> 공식 페이스북


그래서 이 소설은 속칭 ‘불 지르기’로 유명한 대표 소설들 중,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김동인의 <광염소나타>와는 주제의식이 완전히 다르다.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개츠비’는 아름다움이나 예술에 대한 욕망 때문에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생존을 위해, 더 정확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을 지른다. 원작의 이러한 특징은 영화 <버닝>에서 벤이 자신의 방화 이유를 ‘단죄(斷罪, convict)’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묘하게 차이가 있다.



영화와의 차이 ② : 헛간에 대한 집착의 정도  


소설 속의 ‘나’는 그가 조만간 헛간을 태우겠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한 다음날부터 아침마다 동네를 조깅하며 불타버린 헛간이 있는지 ‘검색’한다. 트레이닝 복장에 러닝슈즈를 신고 동네를 샅샅이 살피고 나면, 샤워를 하고 음악을 들은 뒤 일과를 시작한다. 밤새 타버린 헛간은 여전히 없지만, ‘나’는 “한없이 피지컬”하게 매일을 꾸역꾸역 일과를 처리하듯 헛간을 찾는다. ‘나’는 헛간이 없음에도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그저 의아해 할뿐이다. 그리고 살짝 궁금해 할 뿐이다.  


한마디로 소설 속의 ‘나’는 타버린 헛간에 대해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종수(유아인)가 비닐하우스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서 끝내는 적극적으로 벤(스티븐 연)을 미행하기까지 하는 모습에 비하면 지나치리만큼 Cool하다. 반면에 ‘나’는 그녀가 실종된 사실이 꽤 이상하다고만 생각할 뿐, 종수처럼 그 미궁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보려 나서지 않는다. 영화 <버닝>의 Hot함에 비해 소설은 무척 미지근하고 잔잔하다. 영화 속의 종수가 마치 그녀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긴다면, 소설 속의 나는 그녀의 일을 흡사 친분이 조금 있는 남 일처럼 여기는 듯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엇을 태우고 싶었던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에 대해서 말하길, 소설가란 “어떤 물건이나 일에 대해 판단”을 ‘유보’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소설 속에서도 ‘나’는 소설가다. ‘나’는 그녀와 교류하는 동안에도 일용직을 전전하며 아무하고나 쉽게 교제하는 그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기 방식대로 재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실종된 후에도 그녀가 왜 사라졌는지 섣불리 결론짓지 않는다. ‘그’가 소설 속의 나를 향해 “당신에게도 당신의 헛간”이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자신만의 헛간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고 헛간을 태우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그’의 헛간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그만큼 소설 속의 ‘나’는 무색무취한 인간이다.


출처 : KDMB


어쩌면 하루키는 독자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방화로 ‘무(無)’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도덕성을 ‘유(有)’로 꾸며내는 인간이 과연 올바른 존재인지, 그리고 ‘그녀’처럼 일회용품 같은 경험들로 삶을 소비하듯 사는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받으며 낙인찍혀도 좋은 존재인지 말이다.   


영화 <버닝> 속의 등장인물들이 제각기 굴곡지고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는 데에 반해, 소설 <헛간을 태우다>의 등장인물 세 명은 각자의 사연이 애매하고 모호하게 제시된 채 그저 서로 서로 부유물처럼 피상적인 관계만 맺는다. 역시 ‘상실’의 작가가 꾸려낸 단편소설답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대목들이 원작 소설이 영화 <버닝>과 다른 점, 그리고 영화 <버닝>보다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해석하기 난해하고 복잡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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