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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Sea Jul 13. 2024

교과서와 학생 재능이 만나면 생기는 일 2

사슴 같은 눈망울로 일본어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한 아이

"너는 내가 무섭니?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당황한 저는 얼른 했던 말을 취소하며 아이를 달랬습니다. 영어 기초학력 평가에서 점수가 낮게 나와 일정 점수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으로 특별 지도가 필요한 아이입니다.


"선생님이 볼 때 너는 수업 시간에 뭔가 열심히 적으면서 노력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도 영어 기초 학력 평가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네. 혹시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는지 선생님이 따로 봐줄 테니 방과 후에 선생님과 만나서 공부해 볼래?"


교육부에서 기초 학력 학생들을 따로 지도하라는 요청이 있어서 방과 후에 남아서 배울 의향이 있는지 따로 조용히 불러서 물어본 것뿐인데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거예요.


 "무서워서 저 못해요."


저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학생에게 제가 무서운지 물었어요. 수업 시간에 저는 무섭게 하는 편이 절대로 아닌데 왜 무섭다고 할까 매우 궁금했어요.


"아니요. 선생님이 무섭다는 게 아니라 전에 영어 과외를 한 적이 있는데 과외 선생님이 너무 무섭게 가르치셔서 영어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막힌 공간에서 둘이 영어 공부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무서워요."


   덩치도 크고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졌는데 평소에 얼굴 어딘가에 슬픔이 묻어나는 시선이 젖어 있어서 신경 쓰이던 아이입니다. 아이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수다를 떨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이입니다. 웃는 모습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수업 시간에 졸거나 다른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항상 어느 누구보다 집중하며 필기도 열심히 하는 편인데 점수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이 참 의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영어에 대한 수치심과 공포심이 가득차 있어서 영어가 비집고 들어가 있을 곳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분위기와 장소에서 창조적 자신감을 갖고 무엇이든 시도해야 향상이 보일텐데 영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두려움을 머금은 눈으로 수업에 임하고 공부를 한들 무슨 향상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도대체 과외교사가 어떻게 가르쳤기에 아이가 저렇게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영어를 싫어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니 속이 상했습니다.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아이에게 영어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고 떠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수업 시간에 일부러 별다른 관심 없는 듯 지나쳤습니다. 아이가 죄송하다고 말할 때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죄송할 것 없으니 부담 갖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영어에 대한 트라우마가 커서 아이의 엄마도 최대한 아이를 안심시키시려고 했는지 영어공부는 전혀 안해도 되니 걱정하지 말고 아이가 좋아하고 흥미 있어하는 일본어만 열심히 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수업 시간에 '교과서와 학생들의 재능을 연결하기' 프로젝트 수업을 위한 안내를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교과서 내용과 연결하여 활동하고 그 결과물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춤, 노래, 연극, 그림 그리기 등 무엇이든 좋으니 참가하기만 하면 된다고 공지했습니다. 혼자 해도 좋고 둘이 해도 좋고 친구들과 여럿이 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무엇을 할까 서로 의논하느라 교실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무엇을 할 지를 정한 아이들은 에듀 테크인 싱크와이즈 협업 링크를 클릭하여 자신들의 계획을 적었습니다. 전교 1등 하는 아이나 영어에 자신감을 가진 아이들만 들뜬 목소리로 친구들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영어를 어려워하고 존재감이 크게 없었던 아이들의 눈빛에도 생기가 도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중 한 명이 그 아이였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 아이가 제게 조용히 나와서 일본어로 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일본어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본문 내용을 만화로 그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올 지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영어 만화로 그리면 더 좋겠지만 영어 자체를 싫어하니 일본어로라도 그리면 교과서 본문 한글 해석판이라도 여러 번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충분한 시간을 줄 수 없어서 다 못한 학생은 집에서 완성하여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작품에 대해 차별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완성작을 제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큰 부담이 없기에 아주 극소수 몇 명을 빼고는 모두 제출하였고 이왕이면 멋지게 만들어 제출하고픈 욕구들이 충만하여 멋진 작품들이 속속 들어왔습니다. 일찍 제출한 아이들의 작품과 함께 선배들이 남기고 간 작품들도 예시로 보여주니 가닥을 잘 못잡고 있던 아이들이 빠르게 벤치마킹을 합니다.


   저는 항상 아이들에게 퍼스트 핑크 펭귄이 되라고 말합니다. 퍼스트 핑크 펭귄이란 간단히 말하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어 제출하여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친구들의 동기유발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아직 제출 마감일이 많이 남았는데 그 아이가 A4용지에 교과서 본문에 나오는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일본어 만화로 멋지게 그려왔습니다. 폭풍 칭찬을 하니 입가에 작은 미소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핑크펭귄이 되라는 저의 말을 시도하는 아이였기에 제가 조금만 더 미션을 주면 그것까지도 할 것 같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냥  일본어로만 쓰면 선생님처럼 일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작품을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니 한글 번역 버전도 만드는게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만화를 다시 그리기는 힘드니 한 장 더 복사해서 말풍선에 있는 일본어를 지우고 그 자리에 한국어로 바꿔서 써오는 건 어떨까 하고 제안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다 하고 한 마디 더 붙였습니다. 이왕이면 하는 김에 한 장 더 복사해서 줄테니 번역기를 사용해서 영어 버전으로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또 울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손사래를 치면서 방금 밭은 말을 거둬들였습니다. 만화를 너무 잘 그려왔기에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이왕이면 영어 버전까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말한 건데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글 버전으로 쓰다가 틀릴 수도 있으니 틀리면 쓰라고 여분으로 한 장 더 복사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 맘 속에는 한 장을 더 주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지만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선생님한테 그림을 잘 그렸다는 인정을 받고 칭찬도 받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도록 다른 버전으로도 만들어 오라고 하는 말이 싫지 않은 듯 일본어 원본과 복사본 두 장을 들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보였습니다.


   주말을 지내고 교무실로 저를 찾아온 그 아이의 손에는 세 장의 만화가 들려 있었습니다. 일본어, 한국어, 영어... 드디어 그 아이가 영어를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세 작품 모두 훌륭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 그림들을 그리면서 마음 속의 상처와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치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눈빛에서 흐르던 슬픔의 도랑물이 이제는 뭔가 둑을 만들어 가둬놓은 듯한 느낌이 들고 이전보다 더 자신감 있어 보였던 것은 제 착각이었을까요? 


   이제는 아이가 창조적 자신감을 갖고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술성과 언어력을 즐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면의 어린아이와 같은 창조성을 수치심과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고 자신만의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법을 아직은 어려서 아이들은 잘 모릅니다. 주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계속 주목하며 도우려고 합니다. 내면에 상처가 너무 큰 것 같아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는 교사의 위치에 있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 아이 안의 예술성이 자유롭게 훨훨 날아오르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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